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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편집국

[6월6일 현장 2신] '아프리카'로 이명박 잡은 김근태의 분신


‘아프리카’로 이명박 잡은 김근태의 분신
<촛불인터뷰> 나우콤 문용식 대표, “모든 시민은 P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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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촛불집회로 가장 뜬 곳을 꼽으라면 ‘다음 아고라’ 토론장과 동영상 생방송 사이트 ‘아프리카(www.afreeca.com)’다. 실시간 동영상 중계를 할 수 있는 아프리카는 하루 방문객 수가 1백만명이 넘어섰고, 최고 동시 시청자도 25만을 넘었다. 한 때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아프리카 홈페이지를 ‘금칙어’로 걸어 놓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가 ‘오마이뉴스’의 슬로건이었다면 ‘아프리카’의 슬로건은 ‘모든 시민은 PD다’라는 것이다. 평범한 시민이 카메라를 들고 집회 현장을 중계하고, 이 화면을 시청한 시민들이 시위 현장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움직이면서 촛불집회의 파장은 더욱 커졌다.

  ‘아프리카’ 서비스의 운영업체인 나우콤의 문용식 대표(공동대표 김대연)가 이런 새로운 소통의 중심에 서있게 된 것은 현대사의 아이러니다. 서울대 국사학과 79학번인 그는 1980년대를 풍미한 운동권 거물이었다. 1985년 시국사건 민주화추진위원회의 ‘깃발’ 사건으로 1988년 10월까지 복역했던 그는 세 번에 걸쳐 5년 1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수감생활의 대부분을 ‘소통부재’의 독방에서 보낸 그가 인터넷을 통한 ‘소통 전도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92년 선배가 세운상가에서 사준 컴퓨터를 스스로 공부한 그는 지인들과 함께 나우콤(당시는 한국출판정보통신)을 창립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우콤 사원번호 1번을 유지하고 있다. 1994년 나우콤이 PC통신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그는 ‘좀 더 나은 세상’이라는 의미로 서비스 이름을 ‘나우누리’로 지었다.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은 그를 ‘김근태의 분신’으로 기억한다. 2003년 5월부터 2007년 김근태 전 의원이 대선 불출마선언을 할 때까지 5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김 전 의원의 후원그룹인 한반도재단 사무총장을 맡았다. 김 전 의원 진영의 좌장 역할을 맡았던 그는 ‘큰 그림’을 그리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 후원했었다. 대선 문턱에서 좌절하고 총선에서도 떨어진 김 전 의원의 측근이 이명박 대통령의 최대 견제 사이트의 대표라는 것이 흥미롭다. 해외출장을 위해 공항으로 가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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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조 운동권’으로서 이번 촛불집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4-19 이후 중고등학생이 거리에 나오기는 처음인 것 같다. 집회 지도부가 없는 시위라는 것이 새롭다. ‘대중의 지혜’와 ‘자발적 참여’를 통해 이슈와 구호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흥미롭다. 다음 아고라와 같은 토론방이나 아프리카 같은 동영상 중계 사이트 등의 뉴미디어가 120% 활용되고 있다.

  - ‘아프리카’ 사이트가 촛불집회 덕을 많이 본 것 같다.

  요즘은 하루 방문객 1백만명 이상, 최고 동시시청자 25만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촛불집회로 사이트가 질적으로도 발전했다. 전에는 주로 10대 20대가 ‘아프리카’의 주 이용자층이었다. ‘아프리카’는 인터넷과 동영상에 친숙한 세대의 ‘놀이터’ 개념이었다. 그런데 30대와 40대 이용자들이 늘었다. 또 이용자의 시청시간도 길어졌다. 중독성이 생겼다는 것인데, 사이트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진 셈이다.

  - 촛불집회 전에 ‘아프리카’ 사이트는 주로 어떤 용도로 이용되었나?

  게임이나 스포츠 중계가 주류를 이루었다. 엔터테인먼트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 중계를 통해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여론을 형성해내는 대안미디어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 이전에도 ‘아프리카’에서 시사적인 이슈에 대한 방송이 있었나?

  간혹 있었다. 한미 FTA 비준과 관련해 김근태 전 의원이 단식 농성을 하며 반대할 때 지역구의 지지자가 이를 중계방송하기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기간에 ‘안티 김근태’ 방송도 ‘아프리카’를 통해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김근태 캠프의 좌장인 내가 만든 사이트에서 김근태 비난 방송이 이뤄지는 것이 민망했지만, 그런 다양성이 용인되는 것이 이런 대안미디어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 이전에도 이런 대안미디어의 가능성을 확인한 적이 있었나?

  12년 전의 일이다. 1996년 당시 한총련 대학생들이 경찰에 봉쇄되어 있을 때 PC 통신 나우누리의 ‘한총련 폐쇄방’을 통해서 전술적 지침을 전달했다. 12년 전에 텍스트 중심으로 이뤄졌던 것이 지금은 동영상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읽고 이를 통해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젊은 세대의 힘에 탄복하게 된다.

  - 촛불 중계방송을 통해서 스타도 만들어지는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BJ(Broadcasting Jockey)는 누구인가?

  ‘롸쿤’이라는 학생이다. 그는 촛불집회 시작과 함께 중계방송을 시작했다. 그가 중계하는 것을 지켜 본 다른 사람들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계 붐이 시작되었다. 이제 ‘모든 시민은 기자’일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은 PD’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사IN> 고재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