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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편집국

[까칠거칠 on Blog] 그 사과보다는 차라리 이 사과가 진정 사과다


그 사과보다는 차라리 이 사과가 진정 사과다

<시사IN>의 '까칠거칠'에 글을 싣는 칼럼니스트 김현진씨는 '촛불집회 죽순이'다.
촛불이 거리로 나선 5월24일 이후로는 "두어번 빼고" 매일같이 현장을 찾는단다.
지난 금요일에도 삼청동에서 '별동대 놀이'를 했다는 그의 얘기를 <시사IN>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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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띠리릭 하고 문자가 도착했다. 시위 좀 나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예쁜 핑크색 깃발, 이른바 ‘배운 뇨자’들의 모임이 다음까페 ‘소울드레서’ 회원인 친구 B양이 보낸 문자였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시가지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왕년에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는 대통령의 담화문을 듣고 그녀는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사과한다면서 그게 무슨 사과야? 그딴 게 사과냐! 그녀는 외쳤다. 그리하여 화창한 토요일 오후, B양은 대통령에게 진짜 사과가 무엇인지 보여 주기 위해 청와대로 진격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문자의 수신자인 내가 해야 할 역할은 이 날 B양의 보좌관 역할이었다. 나 역시 5월 31일 총리공관 앞에서 양초를 든 채 버티고 있다가 ‘이곳은 군사작전 특별지역으로 필요할 경우 발포할 수도 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므로 친구를 홀로 적진에 보낼 순 없었다. 적진? 내가 방금 적진이라고 했던가? 오 맙소사, 어째서 성동구에 살고 있으며 군대도 안 갔다 온 여성인 내가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종로구의 어떤 지역을 적진에 들어갈 각오까지 하고 가야 한단 말인가. 어쨌거나 그리하여 우리는 돌진했다, 세종로 1번지로. B양의 가방에는 신선한 사과가 들어 있었다.

6월 21일, 여름이 한창이라 낮이 길었지만 벌써부터 종로 일대는 한 차선을 통째로 틀어막고 있었다. 차들의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는 한층 신경질적이었다. 효자동은 일찍부터 깻잎 한 장도 못 지나갈 예술 주차 작업에 한창이었다. 역시 방비는 철통같아서 맥없이 청와대 입구에서 내쫓긴 다음, 삼청동을 공략하기로 방향을 전환했다. 총리공관 옆, 청와대로 통하는 길로 올라가자 벌써 한 무리의 전의경을 이끄는 사복 경찰이 길을 막아섰다. 어디 가십니까? 그러나 우리도 이 장사 하루 이틀 하는 아가씨들이 아니다. 저 위에 슈퍼 가는데요. 아 슈퍼 가신다고요. 슈퍼 앞에 있는 평상에 앉아 아홉 살이나 먹어 능구렁이가 다 되었다는 하얀 개를 쓰다듬으면서 동네 할머니에게 여쭈었다. 할머니, 저 위가 어디예요? 어디긴 어디야 청와대지, 지금은 못 가.

오케이, 제대로 왔다. B양은 구멍가게에서 연양갱을 사서 당분을 보충했고, 나는 빵빵하게 충전해 온 핸드폰의 동영상 촬영 모드를 켰다. B양은 비닐에 담아온 사과를 꺼내 매직펜으로 쓰기 시작했다. 문구는 간단했다. <MB OUT>. 좀전까지만 해도 세상 어디의 청과물 가게에서도 볼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보통 사과였던 그것은, 그렇게 우리에게로 와서 특별한 사과가 되었다. 물론 그 사과를 범상한 사과로 여기지 않은 것은 곧 우리를 가로막은 사복 경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못 가십니다. ” B양은 말했다. 대통령에게 꼭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고. 무전기를 든 경찰은 움찔했서 물었다. 뭘 보여 드리려고 그러시냐고. B양은 사과를 내밀었다.

담화문 잘 들었다. 그게 무슨 사과냐. 차라리 이게 사과다. 진짜 사과 보여드리려고 왔다. 앞으로 사과하실 때 좀 참고하셔야겠다. 놀란 그는 사과를 빼앗으려고 이리저리 손을 내밀었고, B양은 이리 저리 피했다. 그거 이리 주세요, 뭐하는 짓입니까. 우리의 B양, 지지 않는다. 왜 선량한 국민을 탄압합니까. 왜 뺏으려고 하시죠? 이건 그냥 사과인데요. 사과 좀 가지고 온 게 그렇게 잘못입니까. 어차피 껍질은 깎아서 드시면 똑같은데요. 그냥 사과라니까요. 물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해야 할 경찰은 여지없이 화를 낸다. 여보세요, 그게 그냥 사과가 아니잖아요! 한 발 물러나 기록자의 역할에 충실하던 나는 제안한다. 정 그렇다면 여기 소화전 위에라도 올려놓으면 어떨까요. 그분이 오다가다 보실 수 있게.

그러나 그는 그것 역시 거절한다.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가세요 빨리!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를 계속 괴롭힌다. 사과 하나 갖고 뭘 그러세요. 사과 좀 보여드리려고 한 것 뿐인데. 그의 목소리는 한층 커졌다. 아니, 그게 그냥 사과가 아니잖아요! 정말 왜 이러십니까! 그냥 사과가 아닌데 이게! 우리는 당황한다. 그러면, 그냥 사과는 뭐고 다른 사과는 뭡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고 우리를 몰아낸다. 자 가세요, 가세요 나가세요! 어차피 우리가 뵙고 싶었던 ‘그분’에게 사과를 보여 드리기는 틀렸으므로 우리는 퇴각한다. 우리가 완전히 나가는 것을 확인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는 기세로 경찰은 등을 손으로 떠밀며 밀어내지만, B양은 사과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끝끝내 외친다. 그게 뭐가 사과냐, 이게 차라리 사과다! 사과를 모욕 마라! 나도 사과야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하며 맞장구를 치고 우리는 더 열렬하게 쫓겨난다. 그래도, 그게 무슨 사과냐, 이게 사과지.

어제, 대통령은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불법 시위를 엄단하겠다고 선언했다. 한숨이 나온다. 역시 그거, 사과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