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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중학교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장수중학교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2008년 10월 일제고사 때 학생들에게 응시 선택권을 준 교사 7명이 해임·파면 통보를 받은 가운데
12월23일에 또 한번 일제고사가 치러졌다. 학교 차원에서 시험에 응하지 않은 전북 장수중이 화제가 됐다. 
 
 [68호] 2008년 12월 29일 전북 장수·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전북 장수군 장수중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일제고사 날 평소처럼 수업을 하고 특별활동 시간을 보냈다


 
지난 12월23일 오후 2시, 전북 장수군 장수중학교 1학년2반 교실은 아이들 목소리로 왁자지껄하다. 오전에 교과 수업을 마치고 오후 특별활동 시간에는 친목 파티를 열었다. 방학식을 사흘 앞둔 이날, 이 반 학생 26명은 한 학기를 무사히 끝낸 것을 자축하기 위해 각자 집에서 음식 재료를 가져왔다. 달걀과 햄을 구워 김밥을 말고, 떡볶이를 휘젓고 샌드위치와 케이크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서로들 얼굴에 생크림을 묻히며 킬킬거렸다. 같은 시간, 이들과 동갑인 전국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은 모두 똑같은 과학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 중 1·2학년 대상 전국연합학력평가, 이른바 ‘일제고사’를 보는 날 장수중학교는 일반 학교로는 유일하게 시험 대신 정상 수업을 진행했다.

지난 10월14~15일 치러진 초6·중3·고1 대상 전국일제고사(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때도 장수중학교는 조금 달랐다. 다른 학교 교장과 달리, 장수중 김인봉 교장(54)은 현장체험학습 신청서에 사인을 해줬다. 이런 전례가 있는 탓에 12월 시험을 거부한 장수중학교는 순식간에 ‘반골’ 학교로 알려졌다. 조용하던 장수읍내에 언론사 차량이 연이어 들어왔다. 김 교장은 종일 인터뷰에 시달렸다. 격려 전화와 항의 전화가 번갈아 걸려왔다. 한 발신자는 “시험을 안 보면 학교 분위기가 참 자유롭겠다. 힘 잃지 마라”고 지지했다. 어떤 발신자는 김 교장을 꾸짖었다. “도대체 시험을 안 보고 애들을 어떻게 가르치려고 하느냐!”

장수중학교는 시험을 거부하는 학교가 아니다.  1·2학년만 해도 9월 전북도교육청 주관 학력평가, 10월 중간고사, 11월 장수군교육청 주관 학력평가, 12월 기말고사까지 2학기 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시험을 치렀다. 3학년은 거기에 10월 전국일제고사와 고입 연합고사, 모의고사 다섯 번까지 포함해 모두 열한 번 시험을 봐야 했다. 장수중학교는 시험 칠 때마다 아이들 성적을 점검하고 중간·기말고사 때는 학급·학년 전체 석차까지 매겨 통보해준다.

장수중 구성원들이 반대하는 것은 ‘시험’ 자체가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학생이 같은 문제를 풀어 등수를 매기는 방식인 ‘전국 일제고사’이다. 군·도내 학력평가로 충분히 학생 자신의 실력과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뿐더러, 도시 아이들과 비교하면 뻔히 학력 차이가 날 텐데 굳이 ‘전국에서 4등급’을 확인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10월 일제고사를 앞두고 3학년 학생 61명 중 15명이 현장 체험학습 신청서를 냈고, 김 교장은 ‘학부모 의사가 분명하고 학습계획이 확실한’ 9명에게 승인을 내려줬다. 전라북도 교육감은 이 행동이 “국가 공교육에 대한 사회적 우려를 초래한 비위 행위다”라며 인사위원회에 김 교장의 중징계를 요구했다.

시골 아이에게 ‘자포자기’ 부추기는 일제고사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12월 일제고사 날이 다가왔다. 전라북도 교육청은 10월과 달리 이번에는 “학교 구성원 간 충분한 의견 수렴을 거쳐 시험에 응시하지 않을 학교는 명단을 제출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였던 10월 시험과는 달리 이번 시험은 각 시·도 교육청이 연합해 치르는 시험이기 때문에 ‘무조건’ 응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런 공문을 보낸 곳은 전북 도교육청이 유일하다. 전북도교육청은 12월12일 “전국 단위 학력평가를 모든 학생에게 시행하는 것은 인권유린인데 대책이 있느냐”라는 학부모 단체 민원을 받고 이런 답변서를 보낸 바도 있다. “우리 교육청은 일선 학교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기 위해 시험 응시 여부를 선택토록 했으며, 미응시 학교 소속 교사·학생에게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장수중은 학부모 간담회와 교직원 회의를 거쳐 12월 일제고사를 치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체육학교인 전북체육중과 대안학교인 지평선학교도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뒤늦게 전북 교육청은 다른 태도를 보인다. 전북만 일제고사 선택권을 줬다고 부각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다. 중등교육과 한 관계자는 “성적이 낮은 체육특기생·대안학교 아이들까지 시험을 보게 해 좌절감을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에서 공문을 보냈다. 일반 중학교에까지 선택권을 준 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또 학부모 단체에 보낸 답변 내용과는 달리 “장수중이 왜 시험을 거부했는지 한번 조사해볼 것이다”라며 징계를 검토하는 듯한 암시를 남겼다. 

뒤늦게 교육과학기술부의 눈치를 보긴 하지만, 전북 도교육청이 여타 지역과 조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역적 특성’이 한몫한다. ‘사회공공성·공교육강화 전북네트워크’ 김종섭 집행위원장은 “이 지역 학교가 거의 농촌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학부모 정서가 일제고사와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장수중 학부모 한명희씨는 일제고사가 시골 아이들에게 ‘자포자기’를 부추긴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자꾸 시험에 노출돼야 성적이 오른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을 보니 그렇지 않더라. 도시 아이들에 비해 학습 수준이 엄청나게 떨어지는데 일제고사를 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게 시골 아이들에게 얼마만큼 의미가 있을까. 성적 향상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일제고사에 들어갈 예산을 시골 교육여건 개선에 쓰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일제고사 거부를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교육계 현실에서 한 시골 중학교 교장의 ‘상식적 판단’은 ‘불온한 반란’이 돼버렸다. 하지만 장수중 학부모들은 교과부나 교육청 지침보다는 ‘학교 구성원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라는 교장의 교육철학을 믿는다. 교장 징계 계획이 알려지자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것도 학부모였다. 전교생이 215명인데 며칠 만에 232명의 학부모가 ‘중징계 반대’에 서명했다. 학부모이자 장수중 운영위원회 위원장인 이희진씨는 “교장 징계가 내려진다면 학부모들이 나서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본 기사는 <시사IN> 제68호에 게재 되었습니다. -->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