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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까지

후배가 '퀴즈 영웅'이 되었습니다

고재열 기자가 ‘퀴즈 영웅’이 되던 날, 방청석에서는 동료 기자들도 함께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던 그 날의 기억을 신임 노조 사무국장인 김은남 기자가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장면 1. KBS 본관 대기실 “8인의 방청객”

<퀴즈 대한민국> 방청하고픈 사람은 12시까지 KBS 본관 로비에서 만나자는 고재열 기자 문자를 받고 12시 정각 로비에 도착. 근데 와 있는 사람은 이정현 기자(신임 노조 부위원장)뿐.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고기자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전부터 리허설을 했다는 고재열 선수. 이미 옅은 화장을 한 상태더군요. 3개월째 월급 못받는 와중에도 TV 출연을 위해 새로 산 것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초록색 셔츠와 가디건이 나름 프레쉬했습니다.

방송국 앞에서 부대찌개와 계란말이 시켜놓고 점심 먹는 동안에도 고재열 기자는 손에서 정리 노트를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훈련소 들어가던 날 기분 같다”라나요? 밥은 1/3도 채 먹지 않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마구 독려했습니다. 밥 많이 먹으면 머리 안돌아가니 잘 생각했다구요. 2천만원 상금에 눈이 어두워 이제 곧 출정할 동료 밥도 굶기는 비정함이라니. 그래도 돌 던지지는 마시길. 고기자 퀴즈 영웅된 게 다 이렇게 헌신적인 동료들 덕이니까요. ^---^

밥 먹고 다시 KBS로 돌아오니 반갑게도 그새 이숙이 기자(신임 노조 부위원장)가 와 있더군요. 곧이어 도착한 고기자 가족들. 고기자의 아내, 노모, 큰누나, 작은누나(맞나?)에 최근 고기자가 GPS 선물하겠다며 노래하고 다니던 대학 신입생 조카까지 모두 8명의 가족/동료 응원단 진용이 즉석에서 꾸려졌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건 노조에서 만든 선전용 티셔츠와 뱃지를 챙기지 못했다는 것. 녹화장에 들어가보니 미리 응원용 간이 플래카드까지 준비해 온 가족이 있어 이점이 두고두고 더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장면 2. 1~2라운드 “올백점으로 결승에 진출하다”

드디어 녹화 시작. 6명 출연자 모두 한 개성 하더군요. 충남 보령에서 농사짓는다는 아줌마에, 이삿짐센터 직원에, 다음달이 산달이라는 임산부에, 예비 간호사에, 고속도로 순찰대원에, 파업 기자까지...참 대단한 구색이었습니다. 네 번째로 등장한 고재열 선수, 자신은 ‘생계형 출연자’라며 시작부터 쎄게 자신을 소개하더군요. 파업 땜시 넉 달째 월급을 못받아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이 자리에 섰다고 너스레를 떨면서요. ^.^

1라운드와 2라운드에서는 점수 낮은 순서대로 모두 4명을 떨궈내더군요. 2라운드 끝날 때까지 고기자 성적은 올 백.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습니다(룰루~). 근데 실력이 좋은건지, 운이 좋은건지 잘 판단은 서지 않더군요. 고기자에게 걸리는 문제란 게

“70년대 유행하던 만화영화 제목. 요즘 박태환 선수 별명이기도 하죠~”

“다음중 수염이 있는 물고기는? 1번. 메기, 2번 가오리, 3번 잉어, 4번 꽁치”

뭐, 그런 수준이었거든요. -.-

그 사이 PD와 작가가 녹화 전에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았다는 한 출연자는 불운하게도 세 번째로 떨려나고 말았습니다. 첫 라운드에서 문제 두 개를 틀리고 나더니 영 만회 기회를 잡지 못하더군요. <퀴즈, 대한민국> 그 프로, 저는 이번에 처음 자세히 보았습니다만 거의 돈 놓고 돈 먹기 분위기였습니다. 실수로건 실력 부족으로건 한번 문제를 틀린 자는 점수를 만회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구조로 돼 있더군요.

 

#장면 3. 3라운드 “명랑가족 vs 파업가족”

3라운드는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두 사람이 서로 겨루는 구조로 돼 있더군요. 고기자와 더불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라이벌은 이모씨라고, 병원 간호사로 취업이 예정돼 있다는 아리따운 20대 여성이었습니다. 근데 이 여성, 학교 다닐 때 레크리에이션 동아리를 했다더니 인간 그 자체가 명랑덩어리더군요. 자기는 라운드 올라갈 때마다 시청자들 즐겁게 해주려고 성대모사를 준비해 왔다나 어쨌다나. 김애경에서 한석규까지 목소리를 흉내내는데 방청객들이 배꼽을 잡았습니다. 그 가족이며 남자친구는 한술 더 뜨더군요. 효도상품권 걸린 문제를 맞추자마자 그 엄마 되시는 분이 무대로 뛰어올라 신영일 아나운서를 뒤에서 덥석 껴안는데 다들 포복절도~ 난리가 났습니다.

이에 맞선 고기자. 비장의 무기. 승욱이 백일 사진을 꺼내들더군요. 8개월된 아기라 녹화장에 데려오진 못했지만 파업 중에 이렇게 나와 고군분투하는 아빠를 나중에라도 자랑스럽게 기억해줬으면 하는 뜻에서 사진을 들고나왔다고요. 처음엔 허걱!하는 표정이던 신영일 아나운서 왈, 아기 사진 들고 나온 출연자는 고재열이 처음이라더군요.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라구요. ^---^

어쨌거나 게임은 게임.

드뎌 한 단계, 한 단계 살 떨리는 승부가 진행이 됐습니다.

3라운드에서는 인터넷 찬스를 딱 한번 쓸 수 있게 돼 있더군요.

선수를 잡은 상대방 처자 잘나가다가 4번 문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 김동인의 운현궁의 ○, 여기 공통으로 들어갈 낱말은?”에서 인터넷 찬스를 쓰더군요. 내심 안도하며 흐뭇해 한 것도 잠시. 고재열 기자가 “X선의 존재를 처음 밝혀낸 사람은?”이라는 문제에서 인터넷 찬스를 쓰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나중에 이 대목 나갈 때 본인도 엄청 쪽팔릴 겁니다. 나중에 끝나고 물어보니 ‘뢴트겐’ 이름은 떠올랐는데 순간 확신이 없었다더군요).

그러고난 뒤 엎치락뒤치락. 고기자 최대의 위기는 퀴즈 중간에 주어진 힌트 문제를 틀리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제가 이 퀴즈쇼 룰은 잘 모릅니다만 힌트를 맞추지 못했을 경우 바로 상대에게 기회가 넘어가는 모양이더군요(상대에게는 힌트와는 무관한 다른 질문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상대가 퀴즈를 맞추면 게임 끝. 맞추지 못하면 다시 힌트로 문제가 돌아가 계속해서 심화 확장 힌트가 주어지더군요.

고기자가 틀린 첫 번째 힌트는 이것이었습니다.

“불국사에 있는 청운교, 백운교는 국보 ○호다”(혹시 국보 전문 기자인 소종섭 기자는 이 문제 벌써 맞췄나염? -_-;)  

두 번째 힌트는 이렇더군요.

“불국사에 있는 청운교, 백운교는 국보 ○호다. 베토벤이 작곡한 열정소나타는 ○번 f단조이다.”

클래식 애호가 백승기 기자는 혹시 여기서 문제 맞췄을지 모르지만 클래식과 전혀 무관한 고기자 또 답을 맞추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안타깝고 초조하더군요. 죄없는 뢴트겐이 그 즈음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근데 다행히도 바통을 이어받은 상대편 처자, 또 문제를 틀리고 말았습니다. 정답이 피칸파이며, 잣나무며 하는 어찌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들이었는데 어쨌거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어요.

자, 이어지는 세 번째, 네 번째 힌트.

“불국사에 있는 청운교, 백운교는 국보 ○호다. 베토벤이 작곡한 열정소나타는 ○번 f단조이다.”

클래식 애호가 백승기 기자는 혹시 여기서 문제 맞췄을지 모르지만 클래식과 전혀 무관한 고기자 또 답을 맞추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안타깝고 초조하더군요. 죄없는 뢴트겐이 그 즈음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근데 다행히도 바통을 이어받은 상대편 처자, 또 문제를 틀리고 말았습니다. 정답이 피칸파이며, 잣나무며 하는 어찌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들이었는데 어쨌거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어요.

자, 이어지는 세 번째, 네 번째 힌트.

“불국사에 있는 청운교, 백운교는 국보 ○호다. 베토벤이 작곡한 열정소나타는 ○번 f단조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최근 밝혀진 교황은 요한 ○세이다. 로마 알파벳 숫자는 총 ○개이다.”

이렇게 네 번의 힌트가 주어지는 동안 재열이 계속 틀린 답을 말하는데 방청석에 앉은 우리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게도 네 번째 기회를 잡은 상대 처자가 또다시 틀린 답을 말하더군요. 오 마이 갓,  정말이지 뽀뽀하고픈 프리티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어진 다섯 번째 힌트.

여기서 급기야 승부는 갈리고 말았습니다(TV 보시는 재미를 위해 더 이상의 힌트는 생략합니다 ^---^).

“답은 ○개입니다”라는 고기자 대답에 “정답입니다”라는 아나운서 멘트가 이어지자마자

축하 조명과 음악이 현란하게 울려퍼지는데

우리 모두 꿈인지 생신지 정신없이 박수치고 괴성만 질렀습니다.
“고재열 파이팅” “고재열 장하다” 하면서요.

 

#장면 4. 파이널 라운드 "자뻑대장의 눈물”

급기야 ‘퀴즈영웅’ 도전대에 홀로선 고기자.
예상보다 훨씬 침착한 표정이더군요.

도전대 오르기 직전 “야, 정말 여기까지 올라갈 줄 몰랐다” 호들갑떠는 선배들한테 “전 여기까진 당연히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얄밉게 말할 때는 한 대 쥐어박고도 싶었지만 그래도 그 자뻑 정신이 오늘의 고기자를 있게 한 원동력일 터. 도전대에 의연히 서 있는 고기자를 보니 그저 듬직하기만 했습니다.

 파이널 라운드에서는 5백만원짜리 문제 3개, 1천만원짜리 문제 3개, 2천만원짜리 문제 3개중 무조건 3문제를 고르게 돼 있더군요. 그중 문제를 맞춰 2천만원을 넘기면 퀴즈영웅이 되고 문제를 맞추는 데 실패하면 개털이 되는 그런 구조.

고기자는 첫 문제로 천만원짜리 문제를 골랐습니다. 제시어는 ‘팽이’. 이 문제를 고기자 너끈하게 맞췄습니다(자세한 내용은 마찬가지로 방송 보셔야죠? ^^).

두 번째 문제도 천만원짜리. 제시어는 ‘왕’이었습니다. 저는 긴가민가 한 문제였는데, 최근 열흘간 들입다 상식 문제를 팠던 재열. 이 문제에 대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을 하더군요. 재열 답변이 떨어지고 잠시 후. 무시무시한 침묵이 흐른 뒤에 신아나운서가 “정답입니다!!” 외치는데 다들 난리가 났습니다.  급기야 퀴즈영웅이 탄생한 셈이니까요. 그 순간엔 정말이지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분위기가 수습되고 나니 신아나운서가 소감을 묻더군요. 마지막 못한 말 있으면 남기라는 말과 함께. 고기자로서는 드.디.어 멍석이 깔린 셈이죠.

고기자의 소감은 간추리자면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기자들이 파업 넉 달째라면 사람들은 묻습니다. 월급 얼마나 더 받을려고, 또는 휴가 며칠이나 더 쓸려고 그러는 거냐고요. ......하지만 기자는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광고주 압력 때문에 기사가 빠지는 그런 비극적인 일이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생계형 출연자라고 얘기했습니다만 사실은 이 얘기 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우리 동료 기자들, 넉 달째 월급도 못받고 거리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오늘의 이 기쁜 소식이 동료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저희를 끝까지 지켜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얘기하다 고기자, 결국 목이 메이더군요. 듣던 저희도 목이 메이는데, 기뻐선지 서러워선지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파업 이후 오늘이 가장 기쁜 날이라는 것!

그 뒤 마지막으로 도전한 2천만 원짜리 문제는 아쉽게 놓쳤습니다만 여한은 없습니다(아마 본인도 없을 거라 봅니다). 고기자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파업 이후 기자들이 쓴 책 <기자로 산다는 것>에서 고기자는 이렇게 쓴 바 있습니다.

“편집권 수호 투쟁으로 보낸 7개월의 시간, 괴로웠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감동시키는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남이 나에게 감동 받건 말건 어쨌거나 나는 나 스스로를 감동시켰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고 보면 고기자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감동시킨 것을 넘어 동료 기자, 독자, 그리고 시사저널 싸움을 묵묵히 지켜봐 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