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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미리보기

“해경과 공조해 조희팔 중국 보냈다”


“해경과 공조해 조희팔 중국 보냈다”
조희팔 일당을 만나 밀항 협조 요청을 받고
세 차례 밀항을 도운 박창희씨. 그가 조희팔 일당이
중국으로 도피하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해경이 어떤 일을 했는지 <시사IN>에 털어놓았다.

 

조희팔을 중국으로 밀항시킨 박창희씨.

 

충남 안면도에서 양식 수산업을 하는 나는 지난해 가을 4조원대 다단계 사기 피해를 입히고 도피 중이던 조희팔 일당을 만나 밀항 제의를 받고 태안 해경에 처음으로 제보한 사람이다. 그 뒤 해경과 3차례 공조 작전을 벌인 끝에 12월9일 내 보트에 태워 해경이 찍어준 공해상 좌표로 싣고 가서 중국으로 밀항시켰다. 그 터무니없는 사건의 전말을 고백한다.

내가 조희팔 밀항 사건에 연루된 계기는 지난해 10월, 평상시 알고 지내던 한 승려를 만나고부터였다. 전남 여수에서 조개 채취와 납품 일을 하고 있던 10월25일경, 승려 홍아무개씨가 전화해 만나자고 했다. 그날 밤 부산에서 일행 여섯 명을 여수로 데려온 홍씨는 “꼭 부탁할 일이 있다. 사람 하나를 밀항시켜야 하는데 조그마한 회사를 운영하다 4억원을 부도낸 사장이다. 중국 홍콩에 진행 중인 사업이 있어 수배가 떨어지기 전에 밀항시켜야 한다. 섭섭하지 않게 자금을 받아줄 테니 꼭 좀 성사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밀항은 생소한 말인 데다 불법행위에 꼬이고 싶지 않아 거절했더니 홍씨가 밀항하는 데 얼마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선장 인건비와 기름값 등을 따져 1000만원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 했다. 홍씨는 2000만원을 받아줄 테니 ‘왕회장’(조희팔)의 밀항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처음 보는 이들은 당장 내 배를 한번 보고 싶다고 사정했다. 나는 그 길로 세 사람을 태우고 태안으로 차를 몰아 보유하고 있던 내 레저 보트를 보여주었다. 일행은 “이 정도면 딱 알맞습니다”라며 조만간 일을 진행하자고 재촉해 나는 “한번 생각해보자” 하고는 헤어졌다.

며칠 뒤인 11월1일 경 홍씨가 나에게 500만원을 부쳐왔다. 왕회장의 조카 유천이 이미 중국에 건너가 공해상에서 밀항자를 받을 사람을 섭외해 두었으므로 하루 이틀 안에 밀항을 추진하자는 말과 함께. 나는 “이렇게 돈을 보내버리면 내가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면서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꺼림칙해 인천으로 가서 밀항을 시켜본 사람을 수소문했다. 백령도 꽃게잡이 어선 홍아무개씨를 만나 사정 얘기를 했더니 “지금이 꽃게 철이라 공해상에서 수백 척 중국 어선과 쉽게 조우하니 내가 해보겠다”라고 했다. 잘됐다 싶어 백령도 선장을 홍씨에게 연결해줬다. 하지만 홍씨는 “계약금까지 받아놓고 왜 제삼자에게 넘기려느냐. 당신이 직접 나서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망설이는 나를 대전으로 불렀다. 대전의 한 고깃집에는 등산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앉아 있었다. 왕회장이라 불리는 조희팔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보디가드들은 인천에서는 많은 사람이 왕회장의 얼굴을 알아보니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유천이라는 사람이 “내 삼촌 일인데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박 사장이 꼭 일을 맡아달라. 중국 배 접선 장소까지 우리가 보디가드를 붙여줄 테니 안심하라”고 채근했다.

다음 날 홍씨가 1300만원을 추가로 내 통장으로 보내왔다. 배를 운항할 전문 선장 물색조의 비용이었다. 송금한 뒤 홍은 “밀항할 왕회장이 박 사장을 만나고 싶어 하니 안면도에서 보자”라고 말했다.

 
11월2일 왕회장은 밀항을 처음 부탁한 홍○○·유천·조○○·최○○, 내연녀 김○○, 그리고 누군지 모를 남자 1명 일행 등 6명을 데리고 BMW 차량 3대에 분승해 안면도에 나타났다. 검문소가 무서워 겁난다며 그 전에 보자고 해 나는 산 밑 펜션에 방을 예약해주고 기다리라 했다. 검은테 안경에 수염을 붙이고 모자를 눌러쓴 운동화 차림의 왕회장은 두리번거리며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박 사장님이라면 내가 목숨 걸고 따라 나가겠다”라고 말한 뒤 이틀 뒤인 11월4일에 출항하자고 날짜를 직접 지정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다이버 잠수복과 산소통 하나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왕회장을 내 차에 태워 검문소 통과 후 펜션 앞에서 내리기 직전 꼭 좀 부탁한다며 나에게 수표 한 장을 건네주었다. 100만원권이려니 생각했는데 내려서 펴보니 1000만원권 대구 하나은행지점에서 발행한 수표였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조희팔은 다시 잠적했다.

11월3일 밤 10시경 수배자인 김근호와 최○○·조○○·홍○○·김○○이 안면도로 나를 찾아왔다. 이들은 내일로 잡힌 밀항 날짜를 미뤄야겠다고 했다. ‘직원 한 명이 잡혀서 밀항을 연기하자’는 것이 왕회장의 뜻이라고 했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체포된 이는 공동 수배자 최창집이었다.

해경 “왕회장 일거수일투족 보고하라”

첫 밀항 추진이 미뤄지자 나는 홍○○에게 전화해 “내 배는 속력이 너무 느리니 빠른 보트를 하나 섭외해줄 테니 그쪽과 상의해보면 안 되겠느냐”고 발을 빼겠다고 했다. 그는 화를 냈다. 결국 왕 회장을 밀항시켜야 할 상황에 몰린 나는 밀항 전과자를 여러 명 수소문해 만나보았다. 그러나 할까말까 고민이 깊어갔다.

나는 밤잠을 설치다 이 밀항 제의와 고민을 태안 해경에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11월4일 마침 태안 해경 99정 책임자이던 변○○ 정장을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터라 연락해 만났다. “밀항 제의를 받았는데 마음이 불편하다. 4억원 부도를 낸 사람이라는데 꼭 태안을 거쳐 밀항해야겠다고 한다. 부도난 중소기업 사장이라면서 밀항 자금으로 큰돈을 쓰는 것을 보면 범죄 냄새도 나고 해서 나는 개입하기 싫다. 잘 아는 사람을 통해 들어온 제의라서 내 손으로 고발도 못하고 찾아왔으니 왕회장이 밀항한다고 찾아오는 날 해경에서 잠복해 있다가 자연스럽게 불심검문으로 체포하면 안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변 정장은 고민해보겠다며 일어섰다.

다음 날 아침, 변 정장에게서 전화가 와 “서장에게 보고했더니 태안 해경 한○○ 감찰계장을 붙여주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주었다. 이튿날 한계장을 만났다. 범죄를 제보하는데 왜 형사계가 아닌 감찰계에서 나왔느냐 물으니 “큰 사건이라 감찰계 직원을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 계장에게 그동안 있었던 왕회장 일행의 밀항 제의와 돈 문제 등을 죽 보고했다. 한 계장은 다음날 태안 해경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감찰계에서 정식 제보자 진술을 받자고 해서 어차피 제보한 것이니 망설임 없이 따랐다. ‘왕회장이라는 사람에게 밀항 제의를 받고, 홍○○을 통해 착수금도 받았다. 부산 유태파라는데 마약일 수도 있으니 이 범죄 모의 사건을 태안 해경에 제보한다’는 요지로 진술서를 썼다. 처음에 나는 해경에 이 사건을 제보만 하고 빠지고 싶다고 말했다. 검사와 직접 공조 수사하다가 토사구팽 당한 사건 경험이 있어 ‘민간인인 내가 빠지고 경찰이 직접 개입해 해결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해경은 ‘그러면 함정수사가 되어 나중에 피의자를 잡아도 법적 구속력이 없어진다. 당신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해경과 공조 수사가 된 것이다. 해경에서는 이후 왕회장 일당의 밀항 날짜와 마약 동향을 죄다 보고하라고 했다. 왕회장 밀항 추진을 해경에 제보하고 해경의 지시 아래 중국 측과 통화하니 중국 측에서 밀항자를 받을 사람이 공해상 좌표를 불러줬다. 또 해경 한 계장과 기획 공조팀이 된 이상 나는 내 가족과 내 전화에 대한 감청을 부탁했다. 내가 밀항에 이용당하는 과정에서 해상에서 저들에게 죽게 된다든지 하는 경우 아내와 아들 등의 신변을 위해 전화번호도 다 불러주고, 무슨 일 생기면 감청을 통해 사건을 밝혀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또 왕회장(조희팔)·유천·조○○ 등 파악한 인상착의·전화번호·차량 번호 등을 넘겨주고 밀항 추진자들의 신원을 파악해 확보하라고 요구했다. 해경 한 계장은 그렇게 해주겠노라며 나에게 조희팔 일당 접촉 과정과 통화 내용을 시시각각 보고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약속대로 모든 과정을 한 계장에 일일이 보고했다.


 
 

3월2일 조희팔에게 사기당한 피해자들이 시위하고 있다.

11월10일은 왕회장 일행과 첫 번째 밀항을 시도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나는 국내에서 왕회장의 밀항 추진 세력과 중국 쪽 밀항선 추진자들의 신원, 통화 내용 등을 시시각각 몰래 한 계장에게 보고했다. 왕회장을 싣고 공해상으로 출항하기로 한 11월10일 오전 1시, 태안읍에서 만나기로 한 왕회장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 김근호가 나타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근호는 조희팔 사기 사건에서 서울 지역 총책을 맡아 이미 서산경찰서 수배 전단에 올라 있는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던 나는 그를 ‘꺽다리’라 부르며 “왕회장이든 꺽다리(김근호)든 한 명만 밀항시킬 수밖에 없다”라고 거절했다. 그러자 유천이 돈가방을 흔들며 “왕회장이 저 사람 내보내지 않고 자기만 나가면 저사람이 비밀을 많이 알고 있어 큰일 낼 사람이꼭 내보내야 한다고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밀항 작전을 태안 해경에 모두 알리고 공조하는 처지여서 내 맘대로 밀항자를 바꿀 수 없어 거절한 뒤 왕회장이 직접 나오라고 했다. 대신 꺽다리는 산 밑 펜션에 은신처를 마련해준 뒤 이 사실을 해경에 알렸다.


11월10일 첫 밀항을 앞두고 걱정이 앞섰다. 선장의 주민번호와 휴대전화 번호 등도 해경에 불러줬다. 한 계장에게는 “나중에 경찰이 공조한 기획 수사이므로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확인서를 요구했지만 그는 “우리가 믿고 하는 일인데 그런 걱정 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녹취 내용 보유). 나는 또 “밀항 과정에서 우리가 사전에 밀고한 사실을 알아채고 저들이 선상에서 우리에게 복수하려고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고 물었다. 한 계장은 정당한 일을 하므로 정당방위이니 선제 제압해도 된다고 했다.

결국 해경과 공조 아래 내가 왕 회장 밀항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선장은 경찰서에 직접 들어가 선장 임무를 진행하게 되면 범법자가 아니라 제보자·공조자로 인정한다는 확답을 받고 기획 밀항 출발 장소는 안면도에 있는 마금포항으로 정했다. 항구로 들어가는 길이 외길이어서 길목을 지키기 쉬우니 해경과 짜고서 택한 곳이었다. 밀항 전 왕회장은 안심이 되지 않는다며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휴게소에서 나에게 연락해 데리러 오라고 했다. 내 차에 태워 마금포항으로 왕회장 일당을 싣고 들어오는데 밤에 불 꺼진 차들이 줄줄이 서 있어서 순간 ”계획대로 잘되어가는구나“라고 안심했다. 잠복한 형사들이었다. 변장한 왕회장은 겁에 질려 두리번거리며 내 보트에 올라탔다. 선장과 내 후배 김○○(유사시 선장 보디가드)·홍○○·최○○(조희팔 보디가드인 대구 조폭) 5명이 배에 올라 새벽 1시에 출항했다. 그러나 선장은 좌표 조작을 못해 출항 후 30분 만에 프로타(선박 내 GPS)가 고장나 좌표 찾기가 어렵다고 연락을 해왔다. 해경에 연락하니 해경에서는 프로타 조작법을 밀항선에 있는 김○○과 직접 통화하여 자세히 가르쳐줬다. 그 뒤 별 소식이 없어 해경이 이들을 공해상 접선 현장에서 체포하고 일이 잘 끝난 것으로 알았다.

해경에 조희팔 측근 주소 제보

그런데 해가 뜨자 밀항선에서 연락이 왔다. 좌표를 찍은 현장에 나가보니 중국에서 밀항선이 나오지 않고 어선만 바다에 쫙 깔려 있더라는 것이다. 결국 해경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어떻게 할 것이냐 물었고, 나는 검문하지 말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제안했다. 한 계장은 “배에 탄 사람들 신원을 다 확보해놓았으니 걱정말라”고 말했다. 한 계장이 태안 해경 서장에게 보고했더니 잡지 말고 풀어주라 했다고 한 계장이 전해왔다. 어차피 다음 기회에 이 길로 밀항과 마약을 진행할 자들이니 그때 오면 잡자 는 것이었다.

왕회장 일당을 실은 밀항선이 되돌아오자 해경은 검거망을 풀었다. 나는 항구에서 기다리다 왕회장을 차에 싣고 빠져나갔다. 이미 실패해 돌아가는 밀항자를 내가 싣고 나가는 걸 해경이 보고 있었으니 당연히 해경에서 내 차를 미행해 왕회장의 행선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알았다. 서산을 지나는 길에 왕회장은 덜덜 떨며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자기가 사업을 하다가 아는 얼굴이 많은 지역이라 지나기 불안하다며 서산 길을 피해달라고 말했다(서산에 다단계 피해자가 수천명에 이름). 검은색으로 짙게 선팅한 차량을, 그것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데 두려워하는 왕회장을 나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당시까지 덜덜 떠는 것이 마약중독자여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서해대교 휴게소에 들어서고서야 왕회장은 안심한 듯 “이번에는 우리 쪽 실수로 중국 배가 나오지 않아 실패했으니 다음에 꼭 성사시켜달라”고 말했다. 휴게소에서는 밀항을 기획한 유천과 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대구의 자택 주소를 적어주며 태안에서 내가 채취한 싱싱한 해물을 택배로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이들이 적어준 주소를 곧바로 해경에 넘겨주고 신원 파악을 해달라고 했다. 부탁대로 해물을 보냈는데 부모들이 잘 받았다고 연락해 와 이 내용도 해경에 알렸다.

첫 밀항 실패 과정에서 자신들이 해경의 손아귀에 있는 줄도 모르던 조희팔 일당은 나름 주도면밀함을 과시했다. 휴게소에서 헤어지자마자 일당은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전화를 폐쇄한 것이다. 이후 왕회장 일행은 나에게 연락을 두절했다. 나는 해경에 가서 경위 보고를 하고 조서도 꾸몄다. 이후 조희팔 일당에게 한동안 연락이 오지 않으니 해경은 나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1차 밀항이 실패한 뒤 한 계장을 만나 고민을 털어놓았다. “경찰과 제보자의 관계를 떠나 형, 동생 관계로 내가 이 일을 계속하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니 한계장은 “내 동생 같으면 하지 말라고 말리겠다.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달라서 제보자의 신변을 보호해주는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으나 법적인 보호는 해줄 수 있다. 그래도 제보자가 들통 나면 상대편에게 피해를 입어도 보호해줄 수 없다” 라고 말했다.

1차 밀항 실패 후 연락이 한동안 끊겼던 왕회장 일당에게서 20일 만에 연락이 왔다. 왕회장의 중국 쪽 밀항 조직이 해온 전화였다. 마침 해경 감찰계장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들과 통화하면서 나는 그들로부터 다음 밀항 시 접선할 해상 좌표를 정해달라는 제의를 받고 해경에 좌표를 요청했다. 중국에서는 2~3일 내에 다시 시도하자고 채근했다.


11월 20일경 왕회장의 밀항을 돕는 조○○에게서 연락이 와 진주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한 계장의 허락을 맡아 진주로 내려가 조○○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이왕 나도 한배를 탄 몸이니 솔직히 말해달라. 공해상에서 중국 선박으로부터 마약 받으려는 것 아니냐.” 조○○는 “박 사장님, 마약은 절대 아닙니다. 그냥 왕회장만 중국으로 보내면 끝납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이런 내용을 해경에 그대로 보고했다.

조○○는 내 배가 속도가 느리니 자기네가 신형 엔진을 달아주겠다며 속도 높은 배로 개조해달라고 했다. 경찰에 보고하고 엔진 비용 2500만원을 들여 부랴부랴 배를 수리했다. 왕회장 일행은 신형 엔진 구입비 2500만원, 선장 수고비 1000만원, 기름값 500만원을 합해 4000만원을 대겠다 하고 선수금 1000만원을 줬다. 이때 차 트렁크가 돈다발로 꽉 찬 모습이 보여 이 내용도 한계장에게 보고했다. 이때 나는 왕회장의 은신처가 대구 외곽에 있는 한 사찰이라는 점도 파악하고 역시 해경에 알려줬다. 한 계장에게는 왕회장 밀항 준비 과정에서 엔진 수리비 등 비용을 내가 받아도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밀항에 필요한 경비는 충분히 받아서 써라. 쓰고 남은 돈은 국고로 환수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나는 일부러 경찰의 자금 추적이 쉽도록 내 통장으로 밀항 준비 경비를 보내라고 요구해 관철했다.

배 수리와 엔진 업그레이드 작업이 시작되자 왕회장 보디가드인 조○○와 최○○이 와서 지켜봤다. 이들은 이번에는 1차 밀항 실패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왕회장 조카 유천이 직접 중국에 들어가 100톤짜리 중국 어선을 샀고, 유천이 직접 공해로 끌고 나와 왕회장은 중국 배를 타고 나가고 유천은 우리 배로 옮겨 타고 들어온다고 했다. 배 수리와 2차 밀항까지 내가 받은 총액은 6800만원 정도였다. 이 내용은 해경에 보고하고, 자문을 받았다.

해경의 ‘감시’ 속에서 조희팔이 중국으로 도망가는 ‘해상 작전’에 동원된 2.5t 보트.


조희팔, 2차 밀항 시도 때부터 ‘여유만만’

나는 경찰과 공조해 이 작업을 하면서 나라를 위한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왕회장 일당의 수배 명목이 뭔지 나에게만은 알려줄 것을 해경에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를 위해 나는 차량 번호·휴대전화 번호·주소·인상착의 등을 해경에 넘겼다. 그러나 감찰계장은 그들의 신원은 모르겠다고 했다.

두 번째 밀항 시도일이 11월30일로 잡혔다. 나는 이번에 해경에 밀항 지점 해상 좌표를 찍어달라고 했다. 해경은 126.50, 36.20이라는 좌표를 나에게 줬다. 내가 중국의 왕회장 밀항 준비조직에게 이 좌표를 알려줬다. 밀항일 기상을 해경에 알려달라고 했더니 날씨는 좋으니까 무조건 빨리 나가라고만 했다. 밀항 하루 전날인 11월29일 저녁 왕회장이 일행 10여 명을 대동해 나를 찾아왔다. 특이한 점은 두 번째 밀항 시도 때부터는 왕회장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첫 번째 밀항 시도 때처럼 잔뜩 변장을 하고도 겁에 질리거나 내 차에 태워 접근해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관광객처럼 여유 만만했다. 잠복근무한 형사들이 항구 방파제 곳곳에 낚시꾼으로 변장하고 앉아 있었는데도 밀항 과정에서 아무런 말도 없었다. 또 차도 자기들 차량을 끌고 왔다.

드디어 11월30일 마금포 항에서 자정에 출항했다. 이때도 해경 잠복조들이 사방에 깔려 우리 모습을 지켜봤다. 출항 후 날씨가 좋지 않고 파도가 높았다. 1시간을 달린 후 심한 파도가 덮치면서 프로타가 깨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회항한 뒤 원일호 프로타를 떼어 교체하고 다시 출항했다. 이 과정을 해경에 그대로 보고했다. 2.5톤 배를 고쳐서 두 시간 반을 달려도 악천후여서 전진이 더뎠다. 김근호가 “회장님, 다죽겠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시도합시다”라고 했다. 왕회장도 겁에 질려 ‘경비는 다시 부담할 테니 돌아가자’고 사정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출발 항구로 복귀했다. 두 번째 밀항이 악천후로 실패했다고 해경에 보고하자 “됐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밀항 실패 후 왕회장의 중국 쪽 밀항 인계를 맡았던 유천이 귀국해 찾아왔다. 그는 12월9일을 마지막 밀항 성공 디데이로 잡아줬다. 중국 쪽에서 날짜를 잡아줘 한계장에게 보고했더니 그날 날씨를 조회해주며 ‘날씨가 괜찮게 나오니 시도하라’고 했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실패한 두 차례 밀항은 야음을 틈타 나가서 새벽 시간에 공해상에서 접선하자는 약속이었지만 세 번째는 공해상에서 오후 6시에 접선해 넘겨주기 위해 낮 1시에 출항한다는 것이었다.

12월9일 출항을 앞두고 그 전날 왕회장 일행이 나를 찾아왔다. 특이한 점은 두 번째까지는 BMW 등 고급 외제차를 타고 왔던 왕회장 일행이 세 번째 시도 때는 값싼 국산 중형차들을 몰고왔다는 점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왕회장 일행은 이날 밀항에 성공하고, 가져온 차가 압류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첫 번째 밀항 시도 당시 준비물로 요구한 산소통과 스쿠버장비 대신 이번에는 바다 낚싯대 4개와 미끼를 특별 주문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알 것 없다고 했다. 두 차례 밀항 시도 과정에서는 기겁을 하며 인적이 드문 펜션만 고집했지만 이번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일반 모텔에 숙소를 잡았다. 낮시간에는 왕회장이 애인 김○○과 팔짱을 끼고 아무런 변장도 하지 않은 채 관광객 사이와 백사장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포구에서도 여유만만했다. 대낮에 보란 듯이 얼굴과 신원 노출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유 활보를 했던 왕회장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 과정에서 해경 요원들이 쫙 깔려 잠복 근무하면서 먼발치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들여다보고 있었다.

12월9일 오후 1시 출항을 앞두고 나는 몰래 해경에 전화를 걸었다. 왕회장과 그의 보디가드 2명을 태우고 곧 출항하는데 왕회장 일행 차량 번호를 다 적었느냐고 물었다. 해경 한 계장이 마지막 차량을 못 찍었으니 나에게 찍어서 보내달라고 해 내가 마지막 차량번호를 여러 각도에서 찍어 한 계장에게 휴대전화로 보내주었다. 나는 바다에서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내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치고 배에 올랐다. 좌표는 해경이 정해준 곳으로 찍었다. 오후 1시 출항 후 공해상에서 오후 5, 6시께 접선한다는 약속이었다. 두 시간 가량 고속으로 나가니 중국 측에서 연락이 왔다. ‘접선 시간을 새벽 3시로 변경했으니 공해 가까운 섬에서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한국 측 최서단 섬은 격렬비열도였다. 섬 3개가 있는데 왕회장은 그중 무인도 섬에 대라고 했다. 섬 주위에는 해경선 2척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오후 5시께 격렬비열도에 도착하자 왕회장 일행은 나에게 낚시도구를 달라고 하면서 여유 있게 바다낚시를 즐겼다. 당시까지 나는 왕회장의 정체를 모르고 해경과 짜둔 대로 움직였지만 4조원대 대형 금융사기를 일으키고 도주하는 왕회장 일당이 백주에 형사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가운데 버젓이 활보하고 안전하게 밀항선에 오르고, 공해 가운데 무인도에 잠시 정박해도 해경 함정 2척이 근처에서 머물러 지켜보는 상황은 ‘호위’로 여겨졌다. 육안 거리에 해경선 2척이 격렬비열도에서 우리를 지켜봐도 왕회장은 여유만만하게 손까지 흔들며 낚시를 했다. 7시간 정도 낚시를 하던 중 왕회장이 가져온 큼지막한 가방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지 열어보려 시도했지만 보디가드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따라다니는 바람에 열어보지는 못했다. 뭐냐고 묻자 세면도구라고 둘러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가방에는 양도성 예금증서와 달러 등 약 5000억원이 들어 있었다고 들었다.

“5000억원 든 가방 가지고 밀항”

격렬비열도에 머무른 그날 밤 11시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MBC <PD 수첩>에서 기획 취재를 한 조희팔 일당 다단계 사기 사건을 크게 다루며 수배 중인 조희팔의 얼굴을 방송으로 사실상 공개 수배하는 때였다. 왕회장 일행이 왜 12월9일을 밀항일로 택했는지, 그리고 왜 대낮에 해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출항해서 <PD 수첩> 방송이 나올 무렵 격렬비열도 무인도에서 낚시를 하고 공해상 접선을 시도했는지 귀항하고 나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자정 무렵 나는 왕회장 일행을 태우고 배를 몰아 다시 공해상 접선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틈틈이 해경 선박과 조우했지만 야음을 타고 고속으로 탈출해 나가는 조그마한 보트선을 안중에 두는 해경선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안전한 호위대로 생각했다. 이 시간대는 이미 얼굴이 방영돼 만일 해경이 조희팔을 몰랐다 해도 오랜 세월 작전을 해왔기에 해경 전체적으로 발칵 뒤집혀야 맞는 시간대였다. 그러나 무탈하게 넘어갔다. 아침 7시경 중국 측 접선지에 도착했다. 그 근처에도 해경 경비정과 함정이 보였다. 첫 번째 출항 때는 가다가 해경 함정이 보이면 피하라고 왕회장이 겁에 질려 동생에게 외쳤지만 마지막 밀항 때는 그 사이를 지나가도 여유 만만했다. 왕회장은 1차·2차·3차 저지선 넘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중에야 알게 됐다. 해경 저지선은 해경만 아는 선인데 왕회장은 그 이야기를 손바닥 보듯 나에게 한 것이다.

고속 항해 중 그물이 스크루에 걸려 뜯어내느라 시간이 상당히 지체됐다. 그래서 아침 7시30분경에야 접선 장소에 도착했다. 그물로 고장난 내 배는 속도를 못 내어 천천히 공해를 향했다. 좌표에 도착하니 중국 어선으로 보이는 철선 한 대가 서있고 근처에 해군 경비정이 보였다. 배를 갖다 댔더니 중국 쪽에서 나온 배와 내 보트의 일행이 ‘서로 형님, 회장님’ 하고 부르면서 반가워했다. 왕회장 혼자서 중국어선으로 넘어간 것은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만세” 하고 외치고는 내 보트를 발로 걷어 밀어버린 뒤 유유히 중국 쪽으로 나아갔다. 나는 물도 기름도 떨어진 보트에 아무것도 지원해주지 않고 떠나는 그들이 황당했지만 태안 해경에 보고하기 위해 서둘러 항구 쪽으로 배를 몰았다. 그러나 속도는 더뎠다. 2시간 반쯤 가자 해경 경비정 한척이 다가와 내 보트를 한 바퀴 빙 돌더니 아무 기척 없이 돌아갔다.

영해에 들어오니 휴대전화가 터졌다. 나는 회사 직원에게 전화해 사람이나 물건이 넘어온 것은 없고 그저 왕회장 한 사람 밀항한 것으로 끝났으니 빨리 해경에 전해달라 하고 기름과 식량을 실은 다른 배를 보내달라고 했다. 기름과 식량을 어선에 실어서 나온 배는 해경 1명과 우리 직원 1명이 선승해 타고 나온 배였다. 배에서 기름과 식량을 지원받고 마금포 항으로 저녁 10시경 귀항했다.

마금포항구 주변에는 미리 짠 해경 형사들이 쫙 깔려 있었으므로 나와 선장은 배에 남아 있고, 왕회장을 경호하느라 동행했던 4명의 일행이 먼저 내렸다. 이들은 가져온 국산차를 타고 마건포항을 빠져나가자마자 조명등이 환히 켜지면서 경찰이 이들을 덮쳐 체포했다. 체포 과정에서 경찰 스피커폰을 통해 “제보자 신병 확보해, 노출되면 안 되니까’라는 지시 방송이 나왔고 배에서 내리자 전경 한 명이 나와 선장을 안내했다. 해경 감찰계에 앉아 있는데 한 계장이 나에게 다가와 ”야, 엿됐다. 조희팔 여권이 나왔다. 거물을 우리가 넘겨줬다. 무조건 밀항은 몰랐다고 말해라. 마약으로만 말해라”고 지시했다.

“나라를 도운 죄밖에 없다”

그 뒤 해경은 나에게 조희팔에게 돈 얼마를 받았느냐며 통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미 밀항 경비를 왕회장측으로부터 받아 진행하는 과정을 한 계장과 상의했고, 내 계좌 추적도 해놓으라고 사전에 요청한 상태이므로 나는 당연히 아내에게 통장을 가져다 보여주라고 했다. 그러나 통장을 받은 해경의 태도는 돌변했다. “야, 너 조희팔과 한통속이구만. 그동안 돈거래 많이 했구만” 하면서 피의자 조사를 받으라고 했다. 갑자기 공조수사한 나를 범죄자 취급한 것이다. 한 계장은 나를 안심시키며 “밀항 얘기만 절대 감추면 된다. 밀항 얘기 꺼내면 징역 간다”라고 말했다. 서산경찰서 직원들이 와서 나를 조사하는데 해양경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2~3일 뒤 대전지검 서산지청에서 나를 조사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겠다고 하니 태안 해경에서는 변호사 선임을 막았다. 변호사 선임을 위해 변호사와 통화를 하는데 형사가 전화기를 빼앗았다. 한 계장은 나와 가족에게 “이틀이면 나오는데 뭐하라 500만원~1000만원 돈 들여 변호사를 사느냐”라고 만류했다. 그 말을 믿고 기다리는데 검사 구속 영장이 떨어졌다.

기가 막혔다. 아내는 태안 경찰서를 찾아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한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다고 구속시키느냐”라며 난리를 피웠다. 검사 면담을 요구했다. 서산지청 담당 검사에게 일요일 오후에 찾아갔다. 나는 감옥 갈 이유가 없다며 해경과 공조 밀항시킨 과정을 모두 얘기했다. 박 검사는 “당신이 제보자라는 걸 알고 있고, 신변 보호 차원에서 구속한 것이니 사흘 정도만 이해하고 참아달라. 풀어준 뒤 이 사건의 재판이 끝나면 조희팔 밀항 보디가드 4명만 구속하고 당신 서류는 아예 삭제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 나는 “내가 밀항시킨 놈이 조희팔이라면 지금 다른 거물 꺽다리(김근호-서울경인 총책)를 그자들이 보호하고 있다. 빨리 잡아라”고 알려줬다. 검찰에서는 조희팔 사기 사건 수배자 명단과 사진을 가져와 “본 사람이 누구냐”며 찍어달라 했다. 나는 조희팔·김근호·김창영을 찍어줬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김근호는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검사가 사흘 후 내보내준다고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낌새가 이상해 변호사를 선임한다고 했지만 경찰은 끝까지 막았다. 그러나 나는 구치소로 넘어갔다. 영장 실질심사를 하니 담당 판사가 나에게 변호사 없이는 안 된다고 했다. 국선이라도 선임하라고 했다. 검사는 나에게 “영장실질심사를 할 때 내가 판사에 보낸 서류 밑에 당신이 제보자라는 서류를 특별히 넣었으니 안심하고 묻는 말에 ‘예’라고 대답만 하라”고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하지만 영장이 떨어졌다. 아무 죄없는 선장과 나를 구속시킨 것이다. 그 뒤부터 검찰은 나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담당 검찰계장은 “당신이 조희팔과 짜고 밀항 사실을 감추고 마약 사건인 것처럼 밀항시킨 것 아니냐”고 몰아댔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해경과 한 달 이상 3차례 밀항 시도를 했고 신원을 다 넘겼는데 왜 중요 수배자인 조희팔을 넘겨주고 나에게 뒤집어씌우냐고 항의했다. 해경에서 검찰에 넘긴 서류는 나를 범죄자 취급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국가가 국민 한 사람 죽이고자 하면 무섭구나. 살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해경 한 계장에게 연락했다. 한 계장은 나에게 “실은 처음부터 너랑 이 사건 손댈 때 서산지청 검사의 지휘를 받아 진행했고, 그 아래 계장하고도 서산 술집에서 같이 술마시며 이 사건에 대해 깊은 토의를 나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내용을 그대로 녹음해두었다.

12월10일 체포돼 구속당한 나에게는 12월20일경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1월6일 석방되기까지 서산지청은 나에게 돈을 요구했다. “조희팔에게 돈 많이 받은 것 같으니 그 돈을 내놔야 풀어주겠다”라고 했다. 얼마를 달란 말이냐고 물었더니 알아서 임의대로 내라고 했다. 나는 아내에게 말해 500을 검찰청에 가져다주라고 했다. 현금 500만원을 받은 검찰계장은 ‘부족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가 200만원을 마련해 가져다 줬다. 검찰은 돈을 현금으로 받으면서 ‘자의에 의해 국고에 환수시킨다’고 쓰고 사인하라고 했다.

1월6일 석방된 뒤 검찰 계장이 또 전화했다. 1주일 내에 돈을 더 가져오지 않으면 구속하겠다고 협박했다. 액수는 임의대로 가져오라고 했다. 설날을 앞두고 돈이 없으니 못 주겠다고 하자 검찰에서는 ‘기소중지자로 때리겠다’고 나왔다. 나는 너무나 억울해 태안 해경 서장에게 전화해 이 억울한 사연을 해결해달라고 했다. 서장은 “왜 귀찮게 하느냐. 당신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는데 난 모르니 알아서 해라”고 잡아뗐다. 태안서장은 당시 인천 해경으로 옮긴 상태였다. 나와 처음부터 공조한 태안 해경 감찰계장은 사건 이후 인천 해경 본청 감찰주임으로 옮겼다.

검찰계장이 자꾸 돈을 요구하기에 시달리다 못해 조희팔을 밀항시킨 배를 급히 처분해 500만원을 가져다줬다. 그들은 현금 1200만원을 직접 수령해 가면서 아무런 영수증조차 끊어주지 않았다. 계좌로 송금해주겠다니까 그냥 현금으로 가져다 넘겨주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이게 벌금인지 추징금인지, 나는 아직 그 명목조차 모른다.

검찰에 돈을 내고 나서 나는 불구속 기소로 송치됐다. 당초 서류 자체를 없애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졸지에 범인 도피와 밀항단속법위반이란 죄목으로 재판을 받을 처지다. 나를 지휘해 조희팔을 밀항시킨 해경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나몰라라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내가 받은 정신적·물질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해경으로부터 보호 약속을 받고 배를 몬 선장도 구속돼 나는 얼굴조차 들 수 없다. 가지고 있던 배 4척 가운데 3척을 헐값으로 넘겨야 했다. 나머지 보트 1척은 고장 나서 쓰지 못한다. 조희팔 일당을 밀항시키고 오다 고장 난 것이다. 나는 억울하다. 해경의 기획 수사에 끼어 나라를 돕는 줄 알고 실행한 죄밖에 없다.

※이 기사는 박창희씨의 진술로, <시사IN>이 직접 확인한 내용은 아닙니다. 더욱 자세한 전말은 <시사IN> 홈페이지에 게재합니다.

이기사는 <시사IN> 제78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원본 기사 보기 :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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