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를 평양으로 데려오라우” 남문희 (<시사저널> 한반도 전문기자) 필자는 파업노동자다. 엄밀히 말하면 ‘파업 중인 기자’다. ‘날라리 파업’이라 비웃는 이도 있었다.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처절하게 투쟁하는 ‘진짜 파업 민중’들 보기 부끄럽다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18년 일터인 ‘중구 충정로 1가 58-3 청양빌딩 5층 시사저널 편집국’의 철문은 이미 굳게 닫혔고, 자기가 만든 매체의 홈페이지에조차 접근이 차단된, 오갈 데 없는 ‘파업 기자’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회사가 만든 ‘짝퉁 시사저널’이 아닌 ‘진짜 시사저널’를 읽고 싶다는 ‘시사모(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sisalove.com)'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거리’에 편집국을 꾸렸다. 프레스센터 18층 언론노조 사무실은 우리의 ‘오프라인 거리 편집국’이다. 그리고 ‘미디어다음’ 블로거뉴스 란에는 우리의 ‘온라인 거리 편집국’이 있다. 그 거리에서 우리는 특종을 터뜨렸다. 시사저널의 특종 제조기 정희상 탐사전문기자는 2월12일 ‘오마이뉴스’와 ‘미디어다음 시사저널 거리편집국’에 특종 기사를 쏘았다. ‘제이유 사건 검찰 녹음테이프 폭로 사건의 진실’‘제이유 수사검사 녹음테이프 폭로한 강정화씨 인터뷰’라는 기사였다. 그의 특종은 늘 폭발력이 강하다. 그는 ‘기자를 몰고 다니는 기자’이기도 하다. 그의 기사가 폭발하면 시사저널 편집국은 그를 찾는 타사 기자들의 발걸음과 전화 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거리에서 쓴 ‘제이유 기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특종이 ‘낙양의 지가’를 올리기 3일 전인 2월9일, 사실은, 필자도 특종을 했다. 필자의 특종은 필자가 속한 ‘한반도 업계’의 속성상, 늘 그래왔듯 조용히 파묻혔다. 이 업계의 종사자들에게는 은밀함과 비밀주의가 배어 있다. 늘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그런 사실조차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업계에서는, 시간이 꽤 흐른 뒤 누군가 자신이 쓴 내용과 비슷한 기사를 쓰면, ‘내 기사를 받았구나’라고 여기고 그냥 넘어가는 게 관례다. 필자의 특종 역시 정희상 기자와 마찬가지로 시사저널 지면 바깥에서 이뤄졌다. 지난 2월9일 기독교방송(CBS)의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그 1주일 전 필자는 평소 잘 아는 PD로부터 약 20분에 걸친 6자회담 해설 코너에 출연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2월9일은 베이징 6자회담이 이틀째 접어든 날이었다. 원래는 이 날쯤이면 뭔가 결론이 날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협상이 계속 진행 중이었다. 지난 1월16일-18일 베를린에서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와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북미 양자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그 회담에서 도대체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필자는 바로 그 내용을 입수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는 지난번 6자회담뿐 아니라 올해 말까지 북미 간에 진행될 주요 스케줄이 포함돼 있었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에 대한 내용이 핵심이었다. ‘라이스 장관이 올해 9월에 평양을 방문해 연락사무소 개설 문제를 매듭짓고, 북미 관계 정상화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라이스의 9월 평양 방문과 연락사무소 개설이 하이라이트였다. 지난번 6자회담 역시 그 스케줄의 일환이었다. 또 그 내용 중에는 4월에 힐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하고, 이를 계기로 연락사무소 문제가 북미간에 이슈로 제기될 것이라는 얘기도 포함돼 있었다. (시사모 홈페이지(sisalove.com) ‘시사저널 사태 관련 기사 모음’에서 ‘노컷뉴스 - 남문희 기자 "9월 중 라이스 장관의 방북으로 북미관계 정상화논의 본격화 될 것"’이라는 항목을 클릭하면 관련기사를 볼 수 있음)당시로서는 황당한 얘기였다. 아직 6자회담이 진행 중이고, 북한이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 가동중단이나 IAEA 사찰단 문제 등에 대해 어떻게 나올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힐의 4월 평양 방 이니, 라이스의 9월 방북, 그리고 연락사무소 문제 타결 등을 얘기한다는 것은 앞서 나가도 한참을 앞서 나가는 셈이다. 프로그램 담당 PD도 처음에는 약간 당황한 듯 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같은 방송에서 운영하는 <노컷뉴스>에서 ‘남문희 기자 "9월 중 라이스 장관의 방북으로 북미관계 정상화논의 본격화 될 것“’라는 제목으로 스트레이트 기사와 함께 방송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 것을 보면, 그쪽에서도 뭔가 있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예의 침묵이 이어졌다. 표면적으로는 조용했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다. ‘당신이 방송에서 한 말 때문에 지금 시끌시끌하다. 다들 확인하느라 난리다.’
이번에도 사실은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사실로 확인됐으면 됐지 더 토를 달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몇몇 신문이 라이스 방북 시기를 4,5월 경이라고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필자가 확인한 것은 9월이었다. 즉 4월에 힐 차관보가 평양을 다녀오면서 연락사무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 뒤 미국의 실무팀이 평양을 들락거리면서 ‘공사’를 하고 9월께에 가서야 라이스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담판을 하며 연락사무소 문제를 최종 매듭짓는다는 시나리오였다. 아무리 봐도 4,5월은 무리였다. 힐 차관보가 갔다 온지 한 달여 만에 라이스 국무장관이 또 간다? 무엇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김정일 위원장이나 북한 수뇌부가 라이스 장관의 평양 방문에 부여해온 의미나 북미 간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밀고 당기기 해온 그동안의 과정을 볼 때, 그의 평양 방문은 단순한 관광 여행이 아닌 ‘역사적 사건’이 될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성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오라구 해’ 북미 간에 라이스 방북이 이슈로 제기된 것은 지난 2005년 5월 초였다. 당시 부시 대통령이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북핵 문제 협의를 위해 전화 통화를 시도한 적이 있다. 그 실무 협의를 위해 라이스 장관이 중국 외교채널과 통화를 하는 과정에서 북한에 대해 평소 그 답지 않은 과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즉 ‘북한이 핵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위협이었다. 미국 내 공화당 강경파와 네오콘의 공격으로 그의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져 있었고, 그것이 북에 대한 짜증으로 폭발한 셈이다. 그가 위협을 했다는 얘기가 중국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외교부 일꾼들을 불러놓고 “라이스 장관을 데려 오라우.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와서 하라고 하라우”라면서, 그를 초청하라 명했다고 한다. 이것이 북한의 ‘라이스 초청 외교’의 시작이다. 북에서 김 위원장의 한마디는 지상 명령이다. 북한 외교부는 중국 외교부에 협조를 구하는 한편 뉴욕의 외교채널을 통해 미국 측에 의사를 타진했다. ‘우리 장군님이 라이스 여사를 초청했는데 응할 의사가 있는가?.’ 물론 미국 측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미국 내 상황이 그런 요청을 들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쨌건 ‘라이스의 평양 방문 실현’은 북한 외교부의 최대 외교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라이스를 데려오라는 김 위원장의 명령은 단순히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북미관계에 대한 김 위원장의 지론과 철학이 배경에 깔려 있다. 김 위원장이 생각하는 북미관계는 ‘지난 2000년 10월 조명록 차수의 방미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에서 중단된 것’이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방북은 당시 북미 간 현안이었던 미사일 협상을 매듭짓고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 및 김정일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북미 양국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 국무장관이 특사로 평양 방문까지 하고 중단된 게 북미 관계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 출범한 부시 행정부가 ‘외교의 연속성’ 차원에서 이를 계승해야 한다는 게 바로 김 위원장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부시 행정부 초기 북한이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중단된 지점에서 북미관계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라이스를 초청하라는 김 위원장의 뜻은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얘기와 같은 것이었다. 라이스 장관 개인의 능력과 영향력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 및 북한 수뇌부의 높은 평가 역시 그녀를 ‘초청 1순위’에 자리매김한 요인이기도 하다. 지난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에 앞서 라이스 당시 백악관 안보 보좌관 내정자는 미국의 외교전문 계간지 <포린 어페어즈> 1,2월호에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평양 수뇌부가 보기에, 그 뒤 이루어진 부시 행정부 대외정책의 실제적 내용이 바로 그 논문대로 진행되더라는 것이다. 결국 ‘부시를 움직이는 것은 라이스다’라는 인식이 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고, 한걸음 더 나아가 ‘부시보다 라이스를 만나는 게 더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를 보는 것이 ‘그들’의 숙원 사업이 된 셈이다. 그리고는 지난 2006년 11월28,29일 베이징에서 힐 차관보와 김계관 부상이 마주 앉았다. 북미 양자 대화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두 사람은 상반되는 ‘훈령’을 상부로부터 받고 있었다. 힐 차관보는 그보다 앞선 11월7일 미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한 후, 네오콘이 퇴조하면서, 북한과의 관계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라는 훈령을 받고 나왔다. 반면에 김계관 부상은 ‘6자회담에는 응하되 북한이 이미 핵보유국임을 미국 협상대표에게 뚜렷이 각인시키라’는 강경한 내용의 훈령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팽팽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힐 차관보가 느닷없이 ‘부시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만나고 싶어 한다. 우리 둘이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치고 나왔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힐의 발언에 김계관은 당황하며 ‘정상간 만남이 아무런 절차 없이 이뤄질 수 있겠나. 그 전에 라이스 장관이 평양을 다녀간다든지 하면 모를까’라며 슬쩍 맞받아쳤다. 물론 별 기대 없이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우리 말로 ‘언덕(힐)’으로 번역되는 이 보보스 풍의 백인 외교관 입에서 참으로 시원스런 답변이 터져 나왔다. ‘오브 코스. 여건이 마련되면 못갈 것도 없지.’ 그의 이 말에 김계관은 멍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김 위원장의 명령 이후 북한 외교 일꾼들이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렸던 일인가. 그는 훈령이고 뭐고 다 접은 채, ‘다시 만나서 얘기 하자우’하고는 서둘러 보따리를 싸 평양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자기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의 얘기를 전해들은 평양 수뇌부도 술렁였다. ‘드디어 부시가 변하나 보다’는 징표로 힐의 얘기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두 사람의 단독대좌가 다시 베를린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1월16일부터 18일까지 열린 베를린 회담은 사실, 라이스 장관의 평양 방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베이징에서 힐에게 간접적으로 의사 타진을 했지만 라이스 본인의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고 일정을 협의하기 위한 자리였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여건만 된다면 기꺼이 갈 용의가 있다’는, 라이스의 직접 메시지가 전달됐다. 방북 시기는 9월로 합의됐고, 목적은 김정일 위원장과 연락사무소 개설과 관련한 최종 담판을 짓기 위한 것으로 윤곽이 정해졌다. 또한 연락사무소 개설을 김위원장이 수용하면 라이스 장관은 김 위원장에게 그가 그토록 원해왔던 테러지원국과 적성국 교역법이라는 고깔을 벗겨주겠다는 약속을 해주기로 거래 조건도 성립됐다고 한다. ‘라이스의 9월 방북’을 올해 북미 관계의 하이라이트로 정해놓고는 그 뒤 역순으로 거기까지 이르는 실무적인 스케줄을 짠 게 바로 베를린 합의의 내용이었던 셈이다. 즉 1,2월의 BDA 문제 논의 및 해결 그리고 2.13 6자회담 합의, 3-4월 김계관-힐의 교차 방문 및 연락사무소 문제 제기, 그리고 6-8월까지 미국 실무팀의 방북 및 연락사무소 문제 실무 협의, 라이스의 9월 방북 및 연락사무소 문제 타결 등의 일정이다.
도저히 5월 방북 얘기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 필자가 이 문제에 집착을 하게 된 데에는 뭔가 집히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한반도 평화체제’를 부쩍 강조하고 청와대와 외교부 그리고 학계 등에서 ‘남북미 3자 정상회담’ 얘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온 바 있다. 이런 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수소문 결과 필자의 감이 비교적 정확했다. 그러나 실제의 내용에 들어가 보니 허탈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임기를 얼마 안 남긴 현 정부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할지도 모를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진짜 해야 할 일을 간과하고 넘어가는 게 아닌가, 그럴 경우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실패’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것인가. 필자가 확인한 내막은 이런 것이다. 지난해 11월18일 하노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북한이 핵문제에 성의를 보이면 한국 전쟁을 종결하는 ‘종전 선언’을 하고 평화조약도 체결할 용의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의 발언 이후 청와대와 외교부 등에서는 평화협정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당시 여권의 핵심 인사는 필자에게 ‘부시 대통령이 평화협정을 언급한 것은 바로 노 대통령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며 노대통령이 평화협정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이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올해 대통령 선거 일정, 그리고 종전 선언에 걸 맞는 날자 등을 고려했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25일 즈음이 적당하지 않느냐, 부시 대통령도 종전 선언을 위한 세리모니에 참석할 용의가 있다고 한 만큼, 6월25일을 전후해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열어 이 선언을 하는 것은 어떤가라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임기 말을 앞둔 청와대 측에서, 이 아이디어에 무릎을 탁 쳤다는 것이다. 바로 저거다 싶었던가 보다. 마침 6자회담도 성공리에 타결된 마당이라 6자회담 주무부서였던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이 일에 발 벗고 나섰다. 6자회담 이후 송 장관이 부쩍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강조하고. 외교부 영역을 넘어 남북문제에까지 발언의 영역을 넓혀왔던 데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추진할 건가가 문제이다.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이라면 우리만 가지고는 안된다. 미국과 북한이 동의해야 한다. 우선 미국이 관건인데, 때마침 힐 차관보에 이어 라이스가 평양에 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이 얘기를 종전선언 추진 일자와 맞춰보니 4-5월 경이면 좋겠다. 왜 4-5월이냐면, 지난 2.13 6자회담 합의에서 핵문제 해결의 초기 조치를 이행하는 데 60일이라는 기한을 준 바 있다. 대체로 4월13일까지는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 동결과 IAEA 사찰단을 북한이 받아들이는 일이 마무리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즈음에 6개국 외무장관 회담 얘기도 있었으니, 그런 시점에 라이스가 평양을 가서 김정일 위원장과 ‘종전 선언 및 3자 정상회담’에 대해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4-5월 경에는 방북이 이뤄져야 한다. 아니면 이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이스의 4,5월 방북 설은 정부보다는 정부와 아이디어를 주고받던 학계에서 이런 과정을 통해 추론한 뒤 언론에 흘렸다고 한다. 여기까지 내용을 잘 보면, 종전 선언과 남북미 3자 정상회담, 라이스 방북 시기 등에 대한 얘기들에서 그 주체인 미국과 북한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내용은 거의 없다. 다만 우리가 ‘정책 목표’를 세워 그런 방향으로 한번 추진해보겠다는 희망사항이라는 것이다. 몇몇 관계자들 얘기를 종합해보면, 어쨌건 청와대와 외교부는 현재 이런 계획에 매달려 있고, 송민순 장관이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월 초 미국에 간다는 것도 바로 이것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생각대로 된다면야 나쁠 일이 없어 보인다. 또 정책 목표로서 추진해볼만 하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서울이 됐건 워싱턴이 됐던 아니면 평양이건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이 열려 한국 전쟁 종결을 정식으로 선언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생략돼 있다. 미국과 북한이라는 또 다른 참가 당사국들의 사정,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이것이 과연 올해 내 성사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결여돼 있다는 느낌이다. 부시 대통령이 전쟁 종결 선언과 세리모니 얘기를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노무현 정부 임기 내에 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즉 시기를 못 박지 않은 일반론인 셈이다. 그리고 지난 베를린 회담에서 미국이 북한과 합의한 일정대로라면 이번 정권 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9월이 돼서야 라이스가 평양에 가고 연락사무소 문제를 매듭짓겠다는 것인데, 이 일정을 변경한다면 모를까 현재 대로라면 ‘종전 선언과 그 세리모니’가 끼어들 틈바구니가 없어 보인다. 또 내년에 미국의 대선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역시 대선에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금년이 아니라 내년에 세리모니를 하고 싶어할 것이다. 더군다나 북한은 어떤가. 정부가 제대로 이 문제를 추진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북한 측에 ‘특사’를 파견한다든지 하는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히려 북측에서는 지난해 9월 이후 남측 정상과의 직접 대화채널에 관심을 가지고 특사교환 등 여러 가지 제안을 해왔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이미 ‘외교부 채널을 통한 종전선언 및 남북미 3자정상회담 추진’ 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그런 것인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이다. 미국을 통하면 북한을 설득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3자 정상회담을 하겠다면서 정작 당사자인 북한과 소통로가 막혀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난 뒤가 두렵다. 이 정부가 임기 마지막 기간 해야 할 일은 정작 이런 허황된 일이 아닐 터인데, 어찌 보면 신기루 같은 목표를 세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 미국이 북한과 짜놓은 일정대로 올해 9월 라이스가 평양에 가고 연락사무소가 들어가 버리면 사실 게임은 끝이다. 그동안 우리가 그나마 미국에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것은 북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고, 또 채널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앞으로는 불가능해진다. 미국은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가지고 북한 상층부와 수시로 접촉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해버리면 할 말이 없어진다. 남북문제는 우리가 당사자이니 우리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얘기도 더 이상 하기 어려워진다. ‘경제 종속’에 이어 남북 문제에 있어서 조차 ‘대미 종속’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식자우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찜찜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게 아닐까. 왜 부시 대통령이 그때 갑자기 종전선언이라는 파격적인 얘기를 꺼냈으며, 또 힐 차관보 역시 핵문제와 관련한 초기 조치 합의가 이뤄지면 마치 종전선언이 가능할 것처럼 슬쩍 흘렸을까. 라이스 평양방문은 멀찍이 9월로 합의해놓고 말이다. 처음부터 미국이 임기 말 한국 정부가 초조해한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는, 한국 정부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테마를 일부러 던져준 것은 아닐까. 분명 정부 안에도 그런 의심을 하는 사람은 있을 터이건만, 현 정부 핵심부가 승률 10%도 안되는 판을 접지 못하고 모든 것을 거는 도박꾼 같은 심리에 사로잡혀버린 것은 아닐까.
시사저널 거리편집국(http://blog.daum.net/streetsisajournal)은 <시사저널> 파업기자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본지에는 못쓰고 있는 기사들을 올리기 위한 블로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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