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 세력 꿀먹은 벙어리 됐나
14년 동안 ‘국가 안보’를 내세워 제2 롯데월드 신축을
한목소리로 반대해오던 보수 세력이 MB 정부 들어 침묵 모드로 돌변했다.
그들이 벙어리 냉가슴 앓는 사연을 들어보았다.
[시사IN 82호] 2009년 04월 06일 정희상 기자
제2 롯데월드 문제에 대해 보수 세력이 양분되고 있다. 일부는 벙어리 냉가슴이고, 일부는 달콤한 대가 때문에 침묵한다.
사진 왼쪽부터 조갑제씨, 서정갑씨, 이상희 국방부 장관, 박세직 향군회장, 지만원씨, 김용갑 전 의원, 이종구 성우회장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강행하는 제2 롯데월드 신축 허용 결정 과정에서 보여준 보수 세력 전반의 태도가 그렇다. 지금까지 ‘국가 안보’ 문제는 자칭 보수 우익 세력의 단골 메뉴였다. 서울 잠실 제2롯데월드 초고층 허용을 두고 지난 15년 동안 계속된 논란의 반대편에는 항상 ‘국가 안보’를 앞세운 보수 단체와 인사들이 자리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최근 국민적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광석화처럼 해치운 제2 롯데월드 초고층 신축 허용 과정에서 보수의 목소리는 없었다. 과거 같았으면 ‘국가 안보 사수’의 기치를 내걸고 아스팔트로 쏟아져 나왔을 법한 크나큰 이슈였음에도 말이다.
과연 ‘안보 세력’을 자처하는 한국의 보수층에는 그동안 이 문제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시사IN>은 대표 보수 논객, 그리고 ‘행동하는 거리의 우익’을 표방해온 단체와 예비역 군장성 모임 간부 등에게 두루 연락해 제2 롯데월드 신축을 둘러싼 견해를 들어보았다.
안보 관련 주요 이슈가 생길 때마다 적극 목소리를 내온 대표적 보수 논객으로는 조갑제닷컴 대표 조갑제씨와 시스템클럽 대표 지만원씨를 꼽을 수 있다. 조갑제 대표는 “이명박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다르기 때문에 제2 롯데월드를 허용했다고 해서 안보를 희생했다고 믿고 싶지 않다. 기술적인 찬반 양론이 있는 문제라 이명박 정부를 믿고 싶다”라고 말했다. 지난 15년간 보수 세력이 제2 롯데월드를 안보위협론을 내세워 반대했지만 특별한 사정 변경이 없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찬반 양쪽 당사자의 의견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더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라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명박 정부가 과거 좌파 정권과 다르기 때문에 안보를 희생하면서까지 제2 롯데월드를 허가해줄 정부가 아니라서 제2 롯데월드 신축 허용 결정을 믿는다는 것이다.
조갑제씨 “MB 정부가 허용해 믿는다”
시스템클럽 지만원 대표는 조갑제씨와는 주장이 달랐다. 지씨는 “우리 보수 세력으로서야 제2 롯데월드를 허용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입장이지만 ‘오야(MB) 맘대로’ 나가니 그렇다고 반대 운동에 떨쳐나설 수도 없고…”라며 난감해했다. 그는 이어 ‘제2 롯데월드 초고층 허용은 MB 정부가 안보를 팔아먹은 짓’으로 보아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성남비행장 폐쇄라고 본다. 제2 롯데월드를 허용해주기 위해 지금은 프로펠러 공격기 1개 대대를 원주로 이전하겠다고 하지만 이는 정부도 성남공항의 전투비행장 기능을 닫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제2 롯데월드를 짓고 나면 정부는 성남공항을 아예 옮기는 절차를 진행할 것이다.” 보수 논객인 조갑제씨가 “MB 정부는 과거 좌파 정부와 다르기 때문에 제2 롯데월드를 지어도 안보에 문제가 없다는 국방부 주장을 믿어줘야 한다”라는 취지로 말하는 데 대해 지만원씨는 “그것은 지식인이 펼 논리는 아니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지만원씨는 이어 최근 제2 롯데월드 허용을 놓고 MBC 뉴스에서 국가 안보 문제를 들어 강한 반대 논조를 편 점이 보수 단체를 난처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보수 단체는 MBC가 주장하는 것은 무조건 반대로 가야 국가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았다. 그래서 최근 MBC가 제2 롯데월드 허용을 안보 문제로 보도하니까 보수 단체가 더욱 나서서 거론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대표 보수 정객으로 꼽히는 김용갑 전 의원은 제2 롯데월드를 둘러싸고 보수 세력이 처한 딜레마를 이렇게 표현했다. “사실상 아이러니하다. 만일 좌파 정권에서 지금처럼 활주로를 3° 틀어서 허용해주겠다고 했다면 보수 단체에서 반대 집회를 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서명운동도 하고 말이지.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 나오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참 곤혹스럽다.”
지만원씨 “MB가 안보 팔아먹었다”
제2 롯데월드 초고층 허용을 일관되게 반대해온 보수 단체 인사로는 ‘아스팔트의 우익’을 자처하는 서정갑 예비역대령연합회 명예회장도 빠질 수 없다. 서씨는 “제2 롯데월드 허용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너무 졸속으로 잘못 처리했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이 옷을 벗어야 한다고 본다”라고 주장했다.
서씨는 1982년 특전사 장병 53명을 태운 항공기가 성남공항을 이륙한 뒤 악천후로 공항에 바로 붙어 있는 청계산에 충돌해 전원 사망한 참사 사례를 들어 국방부를 비판했다. “현장에는 지금도 당시 항공기 사고 장병들의 순직 추모비가 서 있는데 국방 장관이 그곳에 가보고나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청계산보다 가까운 곳에 555m 건물을 세워놓고도 안전하다고 우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과거처럼 이 문제에 대해 거리로 나서서 반대하는 등 특별한 대응을 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국가 안보와 항공 안전에 대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최근 초고층 신축을 허용한 잠실 제2 롯데월드 부지.
지난 15년 동안 성남공항이 수도 서울을 지키는 전략 공군기지라는 점을 들어 잠실에 제2 롯데월드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해온 대표 세력은 예비역 군장성들 모임인 성우회였다. 하지만 성우회도 올해 들어 제2 롯데월드 신축이 초고속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끝까지 ‘침묵 모드’로 일관했다. 국방부 차관 출신으로 그동안 제2 롯데월드 건설에 앞장서 반대했던 성우회 이정린 사무총장은 “내부에서도 제2 롯데월드 신축에 찬성하는 사람도 꽤 있을 텐데 성우회 차원에서 이런 문제에 나서서 의견을 표명할 필요는 없다”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지난 정권 때는 물론이고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 이 문제에 반대해온 성우회의 태도가 변한 것이다.
이 사무총장은 지난해 5월21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한 전경련 회장단으로부터 제2 롯데월드 신축 허용 건의를 받고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를 내린 직후 가진 한 라디오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2 롯데월드 허용은 오래된 사안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생명을 지키는 안보가 최우선이어야 한다. 성남비행장은 국가 안보와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 유사시 군 전투력을 전개할 공간도 필요하고 대재앙이 왔을 때도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다.”
제2 롯데월드에 대한 성우회의 오랜 반대가 갑자기 암묵적 동조로 바뀐 과정에는 이종구 성우회장과 이상희 국방부 장관의 특수 관계가 한몫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예비역 3성장군인 한 성우회 회원은 “부끄러운 말이지만 성우회는 국방부로부터 선물을 받아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선물이란 남성대골프장 환원이다(딸린 기사 참조).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한 보수”
김영삼 정부 시절 된서리를 맞은 하나회 출신이기도 한 이종구 성우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과 육사 14기 동기생이다. 이상희 장관을 MB 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적극 민 이는 이상득 의원이었는데, 그 뒤에는 이종구 성우회장의 천거가 있었다고 알려진다. 이종구 회장과 이상희 장관은 희귀 성씨인 ‘전의 이씨’ 문중이기도 하다. 그 뒤 이종구 회장은 예비역 장성들의 숙원인 남성대골프장 존치 문제를 어렵잖게 해결할 수 있었다. 국방부는 제2 롯데월드 신축 허용 발표가 있기 직전 ‘안보상의 이유로 남성대골프장 이전을 반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라고 기자 브리핑을 했다. 성우회가 제2 롯데월드 문제에 침묵한 대가라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MB 정부 들어 ‘국익’보다 ‘조직 이익’을 앞세우는 일부 보수 세력의 행태에 내부적으로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보수 정책 브레인을 표방하는 국가쇄신연합 황장수 정책위원장은 제2 롯데월드를 둘러싼 보수 진영의 위기를 이렇게 질타했다. “제2 롯데월드 신축 허용은 취소돼야 한다. 보수는 양심과 균형감각을 가지고 정의로울 때 진정한 보수가 되는 것이지 이것을 잃으면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한다. 보수 본연에 맞게 주장하고 행동할 때 국민도 진정으로 보수를 인정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침묵하는 대가로 골프장 선물” 송파 신도시 예정지구로 편입됐지만 최근 국방부가 이전 반대 방침을 밝힌 남성대골프장.
서울 송파구 남한산성 자락에 자리한 남성대골프장은 현역 장성의 체력단련장 겸 예비역 장성들의 ‘노후 복지시설’로 통한다. 이곳은 4년여 전 정부가 송파 신도시 부지로 편입하면서 이전하기로 예정된 곳이다. 국토부는 2014년까지 남성대골프장과 인근 특전사 터를 포함해 약 277만㎡ 부지(전체 신도시 면적의 40%)에 주택 4만6000여 가구, 인구 12만여 명을 수용할 ‘위례 신도시’를 짓기로 확정하고 토지를 수용했다. 특전사는 이미 경기도 이천에 이전 부지를 마련해 현재 토지 보상이 진행 중이다. 남성대골프장은 국토부가 수도권에 대체 부지를 마련해주기로 대안을 내놓으면서 영종도로의 이전이 유력한 상태였다. 그런데 최근 제2 롯데월드 신축 허용 추진 과정에서 국방부는 갑자기 ‘남성대골프장은 안보 시설이므로 이전이 불가하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전쟁이 나면 남성대골프장에 비축 물자를 저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안보를 도외시한 채 비행장 인근에 초고층 빌딩을 허용해 개별 기업에 특혜를 준다는 비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국방부가 제2 롯데월드 신축 확정을 앞두고 난데없이 남성대골프장에 ‘안보’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국방부가 이렇게 버티면 이미 확정된 국가적 도시계획 사업인 송파 신도시는 사실상 물 건너 간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송파 신도시 부지로 남성대골프장이 포함되자 성우회원 사이에서는 “우리 70 먹은 노인네들이 그 먼 인천까지 어떻게 골프를 치러 다니느냐”라는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상희씨를 국방부 장관으로 미는 데 기여한 이종구 성우회장은 국방부에 골프장을 지켜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육군 출신 장성들 가운데 하나 둘 제2 롯데월드 허용에 찬성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남성대골프장 환원이 상당수 육군 출신 예비역 장성들로 하여금 제2 롯데월드 문제에 침묵하도록 하는 좋은 미끼가 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 공군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은 이렇게 말했다. “국방부가 서울을 지키는 전략 공군기지 하나 사수하지 못하고 제2 롯데월드를 허용해주면서 고작 ‘안보’를 내세워 육군 장성용 남성대골프장을 존치해주겠다는 것이 ‘이명박식 안보냐’며 지금 공군 출신 장성들은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라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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