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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편집국

북으로 북으로 쫓겨나는 은평원주민


북으로 북으로 쫓겨나는 은평원주민

지난 6월 1일, 은평뉴타운 1지구에 대한 입주가 시작됐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길음, 왕십리와 함께 시범뉴타운으로 지정된 후 6년만의 일이다. 1지구의 입주율은 높지 않지만 일부 입주민을 대상으로 인테리어, 부동산, 인터넷, 학습지 업체들의 판촉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입주를 앞두고 집을 보러 나온 주민들과 간간이 이삿짐 업체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입주를 끝낸 이들은 단지 내 분수대로 피서를 나오기도 했다. 이미 흠뻑 젖은 개구쟁이들도 눈에 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은평뉴타운은 점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있다. 과거 이곳 진관동에서 10년 이상을 살아온 원주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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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타운으로 간 집은 스무집 중 달랑 하나"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저곳으로 돌아간다고 했었는데..." 고양시 지축동에서 허름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유장순씨(70)가 밖으로 보이는 은평뉴타운 아파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은평구 진관동에서 24년동안 살았던 유씨가 지축동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 4년이 흘렀다. 고양시 지축동과 은평뉴타운은 창릉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곳이지만 유씨는 도저히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뉴타운 세입자 정책에 따라 49㎡의 뉴타운임대아파트에 들어가게 될 자격을 얻은 그는, 관리비와 월세 합쳐 40만원이 넘는 부담 때문에 뉴타운입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사업시행자인 SH공사로부터 받은 보상금으로 포장마차를 열었지만 하루 먹고 살기조차 빠듯하다. 이따금 이곳을 찾는 북한산 등산객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포장마차에서 TV보는 것으로 소일하는 유씨. "그래도 (이주하기 전) 길 건너 은평에서 장사할 때만 해도 파라솔을 7개나 세우며 크게 판을 벌였다"며 씁쓸히 웃는다. 비싼 임대료로 인해 뉴타운 입주를 포기하고 외지로 떠난 세입자들은 유씨뿐이 아니다. 유씨는 "내가 알던 스무집 중에서 뉴타운으로 들어간 사람은 달랑 옥희네 뿐"이라며 한숨을 쉰다.

 
2004년, 은평뉴타운 지역의 세입자들과 소유주들은 유씨처럼 은평구와 고양시 경계에 위치한 지축동, 관산동 등지로 이주했고, 일부는 은평구 갈현동부근으로 이주했다. 특히 고양시 지축동과 관산동은 은평구보다도 2천만원정도 낮은 전세 시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양시 관산동의 'ㄷ' 공인중개사는 "은평 뉴타운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주민들이 자유로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 라고 말했다. "은평뉴타운 지역의 원주민들은 지축동이나 관산동 등지로 다수 옮겼고 멀게는 양주까지 이주했다. 당시 은평구 이주민의 30%는 고양시에서 흡수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서울시가 은평뉴타운을 계획했을 당시, 원주민들의 재입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은평뉴타운 원주민들을 위해 SH공사가 마련해둔 물량은 세입자를 위한 임대아파트 1039세대와 거주민들을 위한 특별분양 3338세대가 고작이었다. 서울시에서 공식적으로 집계한 은평뉴타운 지역의 원주민 세입자와 소유주의 수가 각각 4030세대와 4691세대였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계획된 임대아파트와 특별분양 물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애초부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다수의 아파트는 외지인들로 채워지고 소수의 원주민들마저도 고분양가, 고임대가로 인해 입주를 포기하고 있다.

아직 입주를 포기하지 않은 원주민들도 있다. 이들은 원주민재입주자위원회를 조직하고 시공사인 SH공사를 상대로 부당이익금 반환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은평원주민재입주자위원회 이수기 위원장은 "은평 뉴타운에 원주민들은 못 들어가고 돈 있는 외지인들만 들어오고 있다. 3~4천만원 보상받고 3억5천만원의 추가비를 내고 들어오라는데 어떻게 입주할 수 있겠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들 중에는 기나긴 싸움으로 인해 지친 사람들도 다수다. 옛 진관시장터 부근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50대 아주머니는 "길 막고 데모하고, 언론에 알려봐도 서울시와 SH공사는 묵묵부답이라 그새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떠났다. 모두 떠나도 나 혼자서라도 싸우겠다"며 그동안의 서러움을 토로했다. 결국 은평뉴타운사업이 추진된 지 6년이 지났음에도 은평구 원주민의 주거문제는 해소되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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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뉴타운 '출서울기'는 아직도 진행중

기나긴 '재정착 싸움'에 지친 원주민들은 결국 경기북부지방으로 이주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서울 녹번-불광-연신내-구파발에서 경기북부의 지축-삼송으로 이어지는 지하철 3호선의 북쪽라인은 현재 대부분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거나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서울 근교에 정착했던 은평원주민들은 몇 년 안 가 다시 이주해야 한다.

4년 전 은평뉴타운 지구에서 밀려나 고양시 지축동에서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15만원짜리 방을 구해 살고 있는 강아무개씨는 "이주 당시에는 지축동이 재개발될 것이라는 말이 없었다. 이젠 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현재 은평구와 서울북부 지역의 재개발이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이들 지역의 원주민마저 고양시 관산동근처나 양주쪽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집값을 상승시키고 있다. 고양시의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이 지역에 서민주택은 없어진지 오래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전세금 3천5백만원이면 구했을 주택이 이젠 9천만원은 족히 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작 정부가 강북주민들을 위한 뉴타운 운운하며 선전해나가는 동안 강북의 서민들은 멀리 쫓겨나고 있는 셈이다. "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급 아파트만 지어대니, 우린 결국 산꼭대기에서 텐트치고 살아야 할 판"이라는 원성이 은평뉴타운의 현주소이다.

<시사IN> 이재덕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