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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인턴수기

용산 참사 사망 경찰의 부친과 술잔을 마주쳤다



 용산에서 사단이 벌어진 날, 나는 개인사정으로 출근하지 못했다. 그 날 아는 형으로부터 그 일의 대강을 전화로 들었는데 전화통을 붙잡으며 연신 욕을 해댔다. 시절은 무참하고 나는 '인턴기자'란 처지로 무참한 시절을 견디고 있다.
 김종철 선생님은 저서 <땅의 옹호>에서 "문득 모든 수사는 무효라고 느껴집니다."라는 말을 적었다. 비틀대다 하루를 맺을 무렵
그 문장이 왔다.
 이 시절 수사와 어휘의 작동이 무슨 소용이 있나하는 허망함을 느낀다. 느끼면서도 적어야만 하는 나는 '인턴기자'다. 


 어제, 가락동 경찰병원에 다녀왔다. 용산에서 벌어진 일에서 숨진 젊은 사내 경찰의 빈소가 그곳에 마련돼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람의 죽음 앞에 경위와 심정을 물어야 하는 기자의 슬픈 천형을 느꼈다. 고인의 어머니가 혼절해 쓰러지고, 고인의 아버지는 슬픔에 겨워 역정을 냈다. 그 와중에 일간지, 통신사, 인터넷 매체의 수습기자들은 타자를 치고 묻고 따지고 눈치보며 파고들었다. 
 나는 수습 기자들에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시키는 데 어떡하나. 나도 싫다, 이럴 때 기자는 정말 할 직업이 못된다."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긍정하려고 노력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밤에, 고인의 아버지와 술잔을 두고 마주했다. 결국 나도 물어야 했다.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더없이 허망할 물음이었다. 
 고인의 아버지가 전하는 고인을 들었다. 앞서 고인의 여러 동료, 친지의 얘기를 들었는데 다른 얘기는 없었다.
 고인은 '성실하고 올바르고 착실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정작 얘기의 당사자는 없었다. 


 빈소엔 '한승수, 어청수, 박희태, 이회창'등이 다녀갔다. 그 때마다 젊은 기자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이해하고 긍정하려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