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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까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시사저널 기자들의 릴레이 편지 7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곳이 바로 남한산성이구나’


지난 6월17일, 정부의 취재지원 선진화 시스템 문제를 다룬 ‘노무현 대통령 언론인과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도 인터넷신문협회장 자격으로 참석했었는데, 이 토론회를 보면서 대통령이나 언론단체 대표들이나 참 ‘한갓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업기자 입장에서 보면 그랬습니다.

비유하자면, 임기를 반 년 정도 밖에 남겨놓지 않은 망해가는 명나라(노무현 정부)와 시급한 국방(언론자유) 문제는 팽개친 조선 사대부들이 공허한 고담준론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날은 시사저널 기자들이 청나라(삼성)의 기사 삭제 침입을 받고, ‘펜은 돈보다 강하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농성하기 시작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무의미한 대화를 보면서 제가 오직 하나 관심을 가졌던 것은 우리 시사저널 문제가 회자되느냐 마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화에 참석한 패널 5명 중에 2명(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정일용 기자협회장)이 시사저널 사태와 관련해 금창태 사장에게 고소당했고 다른 2명(이준희 인터넷기자협회장, 신태섭 민주언론시민연대 대표)도 시사저널 문제에 관여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쉽지만 이준희 회장이 잠깐 언급해주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삼성이라는 칸으로 대표되는 자본권력의 언론통제 문제가 저는 우리 언론계의 가장 시급한 현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칸에 봉사하는 선봉장 용골대, 금창태 사장 같은 사주(혹은 경영진)의 편집권 간섭으로부터 기자들이 ‘내적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저에게 기자실을 두느니 마느니 싸우는 기자들의 모습은 나라가 망해가는데 성리학과 양명학을 놓고 싸우는 사대부들의 모습과 그대로 겹쳤습니다.

시사저널 사태 1주년, 그리고 파업 6개월. 참 허겁지겁 살았습니다. 파업은 말 그대로 업을 파한 것인데, 웬일인지 저는 더 바빠졌습니다. 김훈 선생님이 제 주례를 봐주시면서 내린 미션은 ‘물적 토대를 구축하라’는 것이었는데, 그 미션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파업 기자 중에서 드물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데, 투쟁과 밥벌이를 함께 하는 것은 예배와 장사를 함께 하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한 것이었습니다.

일주일에 7일 동안 일합니다. 새벽 3시 반쯤 일어나서 정치기사들을 샅샅이 훑어봅니다. 그리고는 하나의 컨셉을 잡아 방송 원고를 작성하고 6시 반쯤 라디오로 정치브리핑을 합니다. 방송을 마치고 7시쯤 자서 9시쯤 다시 일어납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면 노조 회의나 집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의나 집회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이 점심을 먹을 때 다시 신문과 인터넷을 보고 기사를 스크랩합니다. 다시 방송 원고를 쓰고 3시쯤 뉴스브리핑을 합니다. 이 방송을 마치고 남은 노조일을 하거나 신매체에 함께 할 투자자를 만나고 다닙니다. 주말이 되어도 사정은 똑같습니다. 토요일엔 토요일의 방송이 기다리고 있고, 일요일엔 일요일의 방송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장인어른이 큰 수술을 받으시면서 이 다람쥐 쳇바퀴가 더 빨리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장인어른 병 수발을 드느라 자주 병원에 들락거려야 했고 10개월 된 아들놈의 뒤치다꺼리는 온전히 제몫이었습니다. 장인어른은 못난 사위 때문에 받지 않으셔야 할 고통을 받고 계십니다. 금창태 사장한테 그런 전화만 받지 않았더라도 병세가 그렇게 악화되지는 않으셨을텐데...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곧 회복하셨습니다.

이렇게 방송을 하면 3만원(좀 심했다)도 받고 4만원도 받고 5만원도 받고, 운 좋으면 8만원도 받고, 한 시간 정도 입에 단내 나도록 떠들면 10만원도 받고 합니다. 요즘엔 언론고시 관련 학원에서 기자 지망생들을 놓고 언론사 시험에 대비해 가르치는 일도 합니다. 먹고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헉헉거리며 일주일을 버티며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을 팔잔가 보다’고 자위합니다.

이렇게 밥벌이를 하는 저는 밥벌이를 하느라 지쳤고 따로 밥벌이를 하지 않는 선배들은 배고픔에 지쳤습니다. 정말 많이들 지쳤습니다. 시사저널 사태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알면서도 안 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파업기자 23명의 신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22명입니다.

두어 달 전에 1명이 이탈했는데, 저는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이탈한 뒤로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저 안쓰러울 뿐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너무나 지쳤습니다. 기사 삭제 사건에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는 금창태 사장에게 지쳤고, 6개월 동안 파업을 하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 심상기 회장에게 지쳤고, 이들을 위해 제 멱살을 잡고 ‘죽고 싶냐’고 으르렁거리는 직원들에게 지쳤습니다. 그리고 시사저널 사태에 침묵하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에게 가장 많이 지쳤습니다. 이제 더 이상 지치기도 지쳤습니다.

다시 남한산성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파업기자들은 예외 없이 죽어서 아름다운 길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심상기 회장의 집을 우리가 죽어야할 남한산성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아름답게 죽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 것은 그냥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게 부활할 것입니다. 시사저널 기자의 이름으로는 죽지만 다시 아름다운 기자의 이름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시사저널 제호는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시사저널 정신을 간직한 새로운 매체를 만들어 다시 독자들과 만날 것입니다.

이 새로운 길에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기사삭제 사건이 발생하고 기자들이 파업을 하고 직장폐쇄를 당해도 관심 없던 언론이 우리가 신매체를 창간한들 관심이나 가져줄지 회의적인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할만큼 했다. 언론자유의 성전에 더 이상 바칠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우리를 던지기로 했습니다. 파업 기자들에게 제일 아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돈입니다. 우리는 그 돈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퇴직금으로 신매체를 위한 초기 자본금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독자들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파업기간 내내 머리에 맴돌았던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영화 <미션>입니다. 인간사냥꾼 멘도사에서 로드리고 신부로 거듭나, 원주민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산화한 로버트 드니로의 모습에 제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보곤 했습니다. 소영웅주의의 발로일지 모르지만 나태한 기자에서 강인한 파업기자로 재탄생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파업 전, 분명 저는 경건한 삶을 살았던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처럼 정도 언론의 길을 가는 바른생활 기자는 못되었습니다. 타락한 정도까지는 아녀도, 무척 나태한 기자였습니다. 이 점이 파업기간 동안 우리를 변함없이 지지해주는 시사모 독자분들에게 가장 미안한 점입니다.

그러나 파업이 제게 준 '미션' 덕분에 저는 짧은 시간이나마 아름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정복자들의 침입을 막다가 허망하게 죽은 로버트 드니로처럼 이제 투쟁을 마감하게 되었지만, 아름답게 부활해 번듯한 기자 노릇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그 새로운 길에 함께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파업 기간 동안, '이 파업이 언제쯤 끝날까'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디쯤 왔을까'를 짐작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종착점인 줄 알고 달려온 지점이 종착점이 아니라 반환점이 되어버렸습니다.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기까지 달려온 싸움의 성과물을 거두는 귀향길이라니 힘이 납니다.

이제 시사저널 파업의 '일리아드'는 끝났습니다. 시사저널 창간정신으로 되돌아오는 '오딧세이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길에 여러분들이 동참해 주시기를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지루하고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7년 6월22일 시사저널 고재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