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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인턴수기

애청 프로그램 폐지 막아보자, 라디오 청취자들이 나섰다





윤한기씨는 "공영방송은 영어전문채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화를 통해 지식과 교양을 쌓는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도 교육이다!” 손글씨로 덮인 흰색 피켓이 겨울바람에 흔들렸다. 지난 2월 9일 윤한기씨(41)는 서울 도곡동 EBS 교육방송 사옥 앞에서  난생 처음 1인 시위를 벌였다.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이하 한문페)는 EBS FM 라디오에서 문화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음악과 미술, 공연, 문학, 영화 등의 최신소식과 주목할 만한 작품을 소개한다. 2002년에 시작해 두터운 매니아 층을 확보했다. 진행자 한영애씨는 2008년 한국방송대상에서 MBC 최유라씨와 강호동씨, SBS 이숙영씨 등 쟁쟁한 후보들을 누르고 진행자부문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 해 말 <한문페> 제작진은 2009년 봄 EBS 라디오 개편안에서 <한문페>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통보받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애청자를 중심으로 ‘한문페를 살리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이하 한살모)이 결성됐다. 한살모 회원들은 온라인카페에서 폐지 반대 탄원서와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EBS에 이 뜻을 전하기란 쉽지 않았다. 회원 신명숙씨(36)는 통화를 시도한 지 사흘만에 편성팀과 단 한번 통화할 수 있었다. 돌아온 답변은 “편성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뿐이었다. 지난 2월 6일 한살모 회원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EBS 사옥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윤씨는 “문화교양프로그램을 공영방송 EBS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는가? 이것을 항의하러 이 자리에 섰다"라고 말했다.


 청취자들의 이런 행동은 단순히 즐겨 듣던 프로그램 하나를 지키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EBS는 전기료에 포함된 수신료의 3%를 사용하는 공영방송이다. 신씨는 “공영방송에서 문화프로그램을 보호하지 못할망정 폐지하다니 기가 막히다”라고 말했다. 2009년 전반기 EBS 라디오 기본편성표에 따르면, <한문페>는 오는 28일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3월부터는 그 시간에 <모닝 스페셜>이라는 영어 프로그램이 확대 편성돼 전파를 탄다. 고전소설을 라디오 드라마 형식으로 풀어주는 <고전극장>시간에도 원래 1시간 분량이던 <팝스 잉글리시>가 두 배로 몸을 불리며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EBS 라디오 편성안에서 영어 관련 프로그램은 일주일에 90시간이나 된다. 중·고등학교 영어 듣기 방송을 제외해도 영어 관련 프로그램은 일주일 방송시간의 약 60%를 차지한다.


 EBS 라디오의 다른 문화 프로그램도 하차 위기에 처했다. 배우 명로진씨가 진행하던 <책으로 만나는 세상> 역시 이번 개편에서 사라질 예정이다. 대신 해당 시간대에 <직장인 성공시대>가 확대 편성됐다. 이 프로그램은 ‘몸값 3배 올리기’나 ‘성공화법과 협상전략’ 등 자기관리와 처세를 다룬다.


 1인 시위에 나선 <한문페> 애청자는 대부분 직장인이다. 이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 피켓을 들고 섰지만 정작 EBS 내부는 고요하기만 하다. EBS 편성팀 관계자는 “편성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17일 편성 기자회견에서 공식입장을 밝힐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EBS는 이미 신설 영어 프로그램에 근무할 조연출 모집 공고까지 낸 상태다.


 이와 비슷한 일은 지난 해 KBS 한국방송에서도 발생했다. 당시 <TV, 책을 말하다>는 지상파에서 유일하게 책을 다룬 방송이었다. 문화계와 출판계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하지만 KBS는 시청률이 1%대라는 이유로 프로그램을 내렸다. SBS 역시 공연과 여행지, 책 정보를 다뤘던 <금요컬처클럽>을 지난 해 12월 폐지했다.


 “EBS에 문화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하나 정도 있어야 하지 않나?” 2002년 EBS 간부의 이 한 마디로 기획된 문화 프로그램이 바로 <한문페>였다. 7년이 지난 지금도 EBS는 여전히 공영방송이다. 하지만 이제 ‘문화 프로그램 하나 정도’는 청취율과 수익이라는 명분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EBS사옥에서 나온 사람들이 신명숙씨가 든 피켓을 보며 지나가고 있다.


글/사진 임병식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