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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편집국

<서울 3신>대한문의 당신에게 - 어느 깽깽이 출신 기자의 조문기 ②



8시40분. 조문길이 덕수궁 돌담길 끝 무렵에 다다랐다. 한편에선 노 전 대통령이 퇴임 무렵 인터뷰를 한 회고 영상이 틀어졌다. 바보 노무현은 마치 이런 날을 준비한 듯 격정에 찬 목소리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을, 그가 추구했던 꿈을 회상했다. 뒤쪽에서 서있던 약사는 꾹꾹 참았던 눈물을 또다시 쏟아냈다. “이인제씨가 대선 후보가 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큰 위기였다. 김영삼 대통령 따라갔다가 도지사하고 경선 불복하고 민주당 와서 선거대책위원장이 되고 대통령 후보가 되려고 하니, 민주주의 위해서 싸운 사람들이 얼마나 큰 위기감을 느꼈겠나. 그 위기감 위에서 제가 지지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논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2001년 겨울. 고향 친구들과 소주잔을 부딪쳤다. 내 고향은 빛고을. 한마디로 ‘깽깽이’ 출신이다. 당시 화제는 이듬해 대선이었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후보였고, 대항마가 누구냐가 관심이었다. 이인제 대세론에 친구들은 투표를 안 하겠다고 했다. 난 ‘흑묘백묘론’을 주장했다. “이인제든 누구든 한나라당 집권만 막으면 되는 것 아니냐. 이인제 빼고 누가 있냐?” 곧바로 돌아오는 육두문자가 섞인 친구의 힐난. 징그럽게 다정한 친구인지라 그놈은 욕부터 해댔다. “야, 새끼야. 노무현이 있지 않냐. 니가 그러면 안 된다. 광주 사람들은, 호남 사람들은 노무현에 빚이 있다. 그 빚을 갚아야지”

그 말이 맞다. 광주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빚이 있다. 대한민국 정치를 기형적으로 만든 지역구도. 어느 정치인도 자유롭지 않은 그 벽을 향해 바보 노무현은 매번 몸을 던졌다. 

1992년. 난 노무현을 처음 봤다. 대학교 1학년. 촌놈은 서울로 왔다. 노무현만큼은 아니어도 넉넉지 않은 살림에 보내준 유학생활. 돌아가신 아버지는 막둥이를 올려 보내며 한마디 했다. “정치에 관심 갖지 마라.”

그럴 수 없었다. 그해 3월 이지문 선배가 양심선언을 했다.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대학 1년은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며 공부했다. 그해 12월 대선. 난 전국연합과 정책연합을 이룬 범민주 단일후보 김대중 후보 지지·지원단으로 활동하며 노무현을 처음 봤다. 솔직히 고백하면 광주 촌놈 출신이라 DJ에 대한 맹목적 지지도 팔을 걷어붙이게 한 이유일 게다. 부정하지 않는다. 마지막 대선 후보운동을 마치고 노무현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영남 출신으로 자신을 정치에 입문시킨 YS와 결별하고 DJ를 지지하는 그를 보며, 그때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그러겠지’라고  생각했다.

1992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지원에 나선 노무현(가운데)

하지만 노무현은 달랐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전라도 당’ 후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줄기차게 나가고 나가고 또 나갔다. 왜 그 진정성을 모르겠는가? 2001년 겨울. 그 겨울밤. “니 말이 백번 맞어. 맞는데 그게 노무현이 후보가 되는 게 가능이나 하냐?” 친구와 난 그날 밤 폭음을 했다.

이듬해 3월 민주당 경선. 난 한 노사모의 글을 보았다. <충장로의 당신>으로 시작되는 글은 이랬다.
 
“문득 당신과 헤어지던 1985년이 생각납니다. 서울로 대학을 오고 나서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신입생환영회에서 코가 삐툴어질만치 막걸리를 퍼마시고 3차를 따라갔었답니다. 새벽도 3시가 넘었던 때였습니다.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다른 동기들과 선배들은 주저없이 빨간불인데도 무리지어 건너더군요. (중략) 그런데 같은 신입생 중 함평에서 온 여학생 하나만이 우리와 함께 건너지 않고 파란불을 기다리다 건너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술자리로 가서 선배 한분이 그 삐딱이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그녀가 답한 한마디는 지금도 내 가슴에 못이 되어 남아 있답니다. "전라도 사람이라 공중질서도 안 지킨다는 손가락질 받기가 싫어서...(중략) 이제 제 고향에서조차 발로 차이고, 모든 거대 언론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으면서도 당신과 우리 광주를 버리지 않았던 미련퉁이 노무현이 당신을 찾아갑니다. 나 이렇게 살았노라며, 그러나 양심과 의리가 당신들과 함께하기를 원했다며 지치고 힘든 노무현이 당신을 찾아갑니다. 힘들고 괴로웠던 길이지만 당신과 광주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며 노무현이 다리를 절면서 당신을 찾아갑니다. 손 내밀어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병신같이 못난 노무현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생각했다. ‘그래 안 되도 좋으니 노무현이다.’

지난 주말 가슴이 쿵 무너져내리던 날. 폭음을 나눴던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답답해 죽겠다. 봉하라도 내려가야겠다”

저녁 9시10분. 조문길이 대한문 앞쪽까지 나갔다. 촛불을 켰고, 기다리는 이들에게 종이학을 접으라며 색종이를 나눠줬다. 조문객은 다양했다. 수녀도, 여고생도, 약사도, 넥타이 부대도 국화꽃을 손에 들고 기다렸다.

저녁 9시15분. 등산 모자를 눌러쓴 바보 노무현에게 국화꽃을 바쳤다. 그렇게 2시간의 기다림 끝에 조문을 마쳤다. 조문 길은 나 자신을, 우리를, 대한민국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저녁 9시20분. 분향을 마치고 나서 보니 여전히 경찰청 차량이 주변을 막고 있다. 건너편 서울광장도, 청계천도 그렇게 경찰 차량이 둘러쌌다. 주상용 서울경찰청장 말처럼, ‘병풍처럼 아늑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청장이나 서울광장을 열어주지 않은 오세훈 시장에게 난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다.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들 때문에 또 한번 확인했다. 만일 광장이 열렸다면, 나를 되돌아볼 시간도 없이 빨리 조문을 마쳤을 것이고, 아마 나는, 우리는 그렇게 바보 노무현을 잊었을 것이다. 조문마저 막는 살풍경을 보면서 작은 다짐을 한다. ‘힘없는 백성들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투표다. 하늘이 두 쪽 나도 투표장에 나갈 것이라고.’

고제규 기자(unjusa@sisain.co.kr)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지면, 누리꾼 여러분이 직접 꾸려주시기 바랍니다

<시사IN>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특집호를 제작할 예정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지면을 꾸리는데 있어서 누리꾼 여러분이 직접 꾸릴 수 있도록 지면을 내어드리려고 합니다.
다음 세 가지 내용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보내주시면 추모 지면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글을 모으려고 합니다.
100자~200자 정도로 ‘나에게 노무현은 무엇이었나’ ‘노무현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노무현의 죽음에 무슨 생각을 했나’ 등에 대해 짧게 소회를 정리해 주시면 됩니다.

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모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으시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추모 앨범’으로 꾸며보려고 합니다.

셋, 노무현 전 대통령 비문 문구를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서에 마을 어귀에 조그만 비석 하나를 세워 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비문에 어떤 문구를 쓸지, 100자~200자 정도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글과 사진은 5월28일 목요일 자정까지 보내주시면 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보내주실 곳 메일: webmaster@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