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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편집국

<서울 5신> 조계사에 쌓여가는 만장과 '죽봉'





조계사는 지금 만장의 물결에 덮여 있다. 분향소가 설치된 대웅전 앞마당 한켠에 비단천 수십 장이 펼쳐져 있고, 분향을 마친 시민들이 그 앞에 서거나 쪼그리고 앉아 서툰 붓글씨로 애도사를 써내려 가는 중이다. 조계사는 노전대통령 장례를 지원하는 불교상장례 연구모임인 연화회 요청에 따라 장례 당일 쓰일 만장 2000여개를 조계사에서 제작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27일 오후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스님이 첫 만장에 글귀를 남긴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만장 제작이 시작됐다.

만장은 형형색색이다. 검정색과 흰색은 기본이요, 노란색, 초록색, 심지어는 분홍색 만장도 눈에 띈다. 검정색 만장에만 익숙해 온 일반의 눈에는 낯선 풍경이다. 노 전대통령 장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어 어제 강원도 인제에서 상경했다는 지성스님은 "성철 큰스님 다비식 때도 오색 만장이 나부꼈다"고 말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지 않는 불교식 생사관이 장례 풍습에 반영돼 있는 셈이다.


만장 제작에는 스님과 불자뿐 아니라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만장에 써내려가는 문구는 다양했다. 조계사 측은, 만장에 어떤 문구를 써넣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성철스님 다비식 만장에 쓰였던 법문 모음집과 일반 시민들이 분향소 조위록에 적어놓은 추모사를 A3용지에 복사해 제공했다. 인근 ㅍ여고에서 수업을 마치고 분향을 하러 왔다는 여고생 3명은 이를 뒤적이다 마음에 드는 문구를 발견한 듯 분홍색 만장에 붓글씨로 이를 또박또박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山河大地現眞光'.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든 것이 진리의 빛을 드러낸다는 뜻의 게송이었다.

그런가하면 가족과 함께 조계사를 찾은 최윤식씨(대학강사)는 분향을 마친 뒤 초록색 만장에 '山崇海深'이라고 적은 뒤 맨 아래 가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넣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었던 노 전대통령의 뜻을 기리는 문구라고 했다. 만장에 쓰는 문구는 쓰다 틀리더라도 다시 고쳐쓰는 법이 없다고 한다. "글씨를 잘 쓰건 못 쓰건, 학식이 높건 낮건, 진심어린 마음을 담는 것이 만장이기 때문"이라고 지성스님은 말했다. 


조계사 측은 예정보다 이른 내일 아침께 만장 2000장이 완성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만장을 쓰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만장을 깃대(죽봉)에 매다는 절차가 진행된다. 불자들은 만장을 깃대에 매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덕을 쌓는다고 믿는다고 한다. 조계사 측 관계자는 "죽봉이 시위 도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장의 절차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애초에 5000개 가량 만들려던 만장을 2000개로 줄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정부 측 입장인지, 장례를 주관하는 측 입장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